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목포의 눈물의 멋과 맛 2015년 12월 28일 (월)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백세시대

가포만 2016. 12. 10. 14:04

어떤 가수든 자신의 대표곡이 있을 것입니다. 일생을 통해 그 대표곡을 과연 몇 차례나 부르게 될까요? 오늘은 불후의 명곡인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가수 이난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가수 이난영의 경우 대표곡 ‘목포의 눈물’을 무대 위에서 과연 몇 번이나 불렀을까요? 아마도 수천 번은 훨씬 상회하지 않을까 합니다.
본명이 이옥순이었던 이난영은 1916년, 목포에서 태어나 7세에 북교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못 가는 날이 많았고, 4학년이었던 1929년 기어이 중퇴하고 말았지요. 제주도로 식모 살러간 어머니를 따라 제주도에 가서 살았습니다. 이후 여러 곡절 끝에 가수가 된 이난영에게 드디어 1934년 운명적인 노래 ‘목포의 눈물’이 다가왔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조선일보에서 공모한 향토가사모집에 1등으로 당선된 목포 청년 문일석의 작품으로 원래 제목은 ‘목포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케레코드의 이 철 사장은 가수 고복수에게 이 노래를 부르도록 미리 결정을 해둔 상태였는데, 작곡가 손목인의 반대로

이난영이 부르게 됐지요. 그 까닭은 노래의 공간배경이 된 장소에서 태어난 가수가 아무래도 더욱 절절히 노래를 소화시켜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난영은 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 가난과 고통 속에서 힘겹던 시절을 떠올리며 마치 유장한 판소리가락과 육자배기의 울림, 진도아리랑의 깊은 파장을 함께 엮어낸 창법으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울음인가 하면 어느 틈에 그 울음을 이겨내는 결연한 끈기가 느껴지고,

하소연인가 하면 슬그머니 그 하소연을 성큼 뛰어넘는 우뚝한 걸음걸이로

저만치 앞서가는 남도 특유의 음악적 파장이 뭉쳐지면서 전체 한국인의

가슴 속에 단단하게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하여 ‘목포의 눈물’은 이제 한국인의 중요한 민족적 무형문화유산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를 잡게 됐지요. 이난영하면 먼저 ‘목포의 눈물’, 목포란 도시를 떠올리면 저절로 이난영의 이 노래를 떠올리는 이신동체적 두 존재가 됐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난영의 삶은 굴곡과 파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작곡가 김해송과 부부가 되어서 무려 8남매의 자녀를 출산했지만 넷을 질병으로 잃었지요. 남편 김해송은 광복 직후 KPK악단을 조직해서 미군부대 위문공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이 때문에 비극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김해송은 북한군에 의해 납북돼 끌려가고 이난영은 졸지에 생과부가 됐습니다. 남편이 운영하던 악극단도 경영난으로 해체되고, 이난영은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서 가수로 키워볼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딸‧아이들을 미국으로 진출시켜 가수로 성공하도록 이끌었는데, 그 딸들이 김시스터즈란 이름의 여성보컬입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자녀들은 모두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이난영의 삶은 나날이 고독하고 황폐해져 갔습니다.
1958년 서울 명동의 시공관 무대에서 고복수 은퇴기념공연이 열렸을 때 이난영은 무대에 올라 ‘목포의 눈물’을 열창했습니다. 말이 열창이지 이난영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흐느낌이 들어있는 애처로운 발성으로 노래를 아슬아슬하게 펼쳐 갑니다. 특히 2절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란 대목에서는 아예 흐느낌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불러갑니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그날의 주인공 고복수가 곁에 다가와 함께 도와서 겨우 마지막까지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날 불렀던 ‘목포의 눈물’은 녹음실황으로 남아서 지금도 우리가 들어볼 수 있습니다. 이난영은 무려 수천 번 이상 ‘목포의 눈물’을 무대 위에서 불렀을 터이나 이날 부른 노래가 단연코 최고절창이 아니었을까 판단해 봅니다. 이난영으로서는 가요계를 아주 떠나는 선배가수 고복수의 은퇴도 슬펐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다가온 삶의 파란곡절과 가파른 운명에 대한 슬픔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흐느끼는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됐겠지요
다시 한 해가 바뀌었으나 살아가는 삶의 행보는 여전히 숨 가쁘고 벅차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전환기에서 우리는 발걸음의 급박한 템포를 한 단계 조절하면서 스스로의 발자국을 찬찬히 되짚어보는 여유를 가지면 어떨까 합니다. 지난날 이난영이 자신에게 다가온 슬픔의 격랑을 조절해보려는 애타는 과정에서 울먹이며 불렀던 ‘목포의 눈물’에 귀를 기울여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은 틀림없이 내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