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노래 ‘어머님전 상서’에 담긴 사연/이동순 백세시대 2014년 10월 31일 (금)

가포만 2016. 12. 7. 13:31

문화도 나이와 세대별로 영역이 나누어지겠지만 그 가운데 대중가요만큼은 아무래도 청년기특유의 전유물이 아닌가 한다. 한 곡의 가요작품에 담겨 있는 가사의 내용이나

곡조의 표현은 대개 청년기의 경쾌함, 발랄함, 멋스러움 따위를 반영하는 것이

일반이다. 어느 시대건 삶의 중심을 이루는 세대가 바로 청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가요작품에는 젊은이의 사랑, 고뇌, 눈물, 고독, 방랑, 탄식, 고통 따위의 감정이 거울처럼 비쳐져 있다.


지금의 노년층은 흘러간 한 때 모두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그 청년들은 강물 같은

세월을 터벅터벅 걸어와서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늙고 병든

몸은 눈먼 새도 찾지 않는다고 하지만 흘러간 옛 가요 속에서 우쭐거리며 활보하던

그 젊은이들은 모두 현재의 노옹(老翁)들이 아니던가.


험난한 식민지시대와 광복전후의 격동, 분단시대의 파도를 직접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분들이다. 옛 가요를 잔잔히 듣다보면 우리 부모세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이전의 선배세대들이 어떤 고통과 악조건을 이겨내고 힘들게 살아왔던가를 고스란히 깨우쳐 알게 된다. 옛 가요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보내주는 아름다움은 이렇듯 고귀하고 소중한

역사적 체험으로 이어진다. 옛 가요 속에는 드물게 당시 실버세대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거의 부모, 영감님, 중년, 행상노인 따위로 그려지고 있는데, 요즘 노래와는 달리 옛 가요에는 경로효친(敬老孝親) 사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표현들이 많았다. 노래를 들어보면 그만큼 그 시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939년 12월 오케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이화자(李花子)의 노래

<어머님전 상백(上白)>(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은 지금 들어보아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더워져온다.


머님 어머님/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나이까/ 복모구구 무임하성지지로소이다/ 하서를 받자오니 눈물이 앞을 가려/ 연분홍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나이다
어머님 어머님/ 이 어린 딸자식은 어머님 전에/ 피눈물로 먹을 갈아 하소연합니다/ 전생에 무슨 죄로 어머님 이별하고/꽃피는 아침이나 새우는 저녁에/가슴 치며 탄식하나요
어머님 어머님/ 두 손을 마주 잡고 비옵나이다/ 남은 세상 길이길이 누리시옵소서/ 언제나 어머님의 무릎을 부여안고/ 가슴에 맺힌 한을 하소연하나요/ 돈수재배(頓首再拜)하옵나이다
-<어머님전 상백> 전문


전체 3절로 구성된 이 노래는 <어머님전 상서>란 제목으로 바뀌어 불리기도 했다.

상백(上白)이란 말은 윗사람께 아뢴다는 말뜻인데 어려운 한자말이라 그렇게 바뀌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면서 우리는 지독지정(舐犢之情)이란 말에 담긴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미 소가 제 낳은 송아지를 줄곧 핥으며 귀여워하는 것을 일컫는데

이 땅의 부모님들은 자녀를 만리타국으로 떠나보내며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 것인가?
일제말 우리의 청년장정들은 지원병, 징용이란 이름으로 모두 일본군대와 전쟁터로

끌려가고, 아리따운 처녀들 또한 정신대(挺身隊)란 이름으로 일본군대에 끌려가서

반인륜적 악행을 강요받았다. 잘 살든 못 살든 가족이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머나먼 타관객지로 끌려가서 강제 격리된 비통한 정황에 처하고 말았으니,


이 노래가사에 담겨있는 고통과 탄식은 이러한 현실의 경과를 참으로 실감나게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가사의 전개과정이 마치 옛날식 한문투의 서간체 스타일로 펼쳐진다.


1절에서 어머니는 객지의 딸에게 잘 있느냐며 안부를 묻고 부디 몸조심하라는 간곡한 당부의 편지를 보내주셨다. 딸은 어머니의 글월을 받고 슬픔과 서러움에 북받쳐 치마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운다. 그런데 그 치마가 연분홍색인 것을 보면 필시 화류계의 여성이거나 순탄치 않은 삶의 굴곡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2절에서 딸자식은 그동안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있던 한을 탄식과 하소연으로 모조리 풀어내고 있다. 시적화자는 어머니와 살아서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조차 하고 있는 듯하다. 3절에서 딸자식은 남은 세상 길이길이 잘 누리시라는

간절하고도 안타까운 부탁을 어머님께 애끓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다. 이 노래는 가수 이화자 자신의 기구한 삶을 다룬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 가요작품이 발표되었던

당시 현실의 구체적 정황과 그 보편성을 너무도 잘 담아내고 있다.


저 멀리 남양군도와 중국 등지로 끌려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받았던 여성들이 삶의 가파른 언덕길에서 이 노래를 피눈물로 부르고 또 불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새삼 가슴이 저미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