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가요 ‘꼴망태 목동’에 깃든 사연 2016년 03월 25일 (금)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백세시대
춘분(春分)을 전후해서 이미 농촌에서는 농사준비로 분주해집니다. 여기저기서 경운기 소리도 들리고 과수원에서는 유황소독을 하는 광경들도 보입니다. 예전 농촌에서는 이 무렵 소들이 논과 밭을 갈았습니다.
황사가 노랗게 낀 아련한 들판에서는 밭가는 농부들이 소를 몰면서 내던 ‘이랴 쯧쯧’, ‘어디 어디’ 같은 외침이 정겹게 들려오곤 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논밭 갈기는 트랙터나 경운기 같은 기계들이 도맡아하고 소들은 그저 축사에서 사료를 먹으며 체중만 잔뜩 늘리고 있을 뿐입니다.
소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거의 같은 시기를 함께 살아왔습니다. 역축(役畜)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에서 생기는 부산물까지 다양한 용도로 쓰였습니다. 전쟁 중에는 대표적인 전리품이었고, 때로는 외교상의 선물이나 하사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소와 관련된 설화에서도 그 주제는 소가 된 게으름뱅이, 송아지로 환생한 아이, 소가 되어 속죄하기, 소와 짝짓기, 소 되었다가 원수 갚기, 소 바꾸고 마누라까지 바꾼 사돈, 잃은 소 되찾기, 지붕 위에 소 올리기 등등 여러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한국인이 살아온 시간 속에서 소는 부와 풍요, 희생과 축귀(逐鬼), 우직과 충직, 여유와 평화, 고집과 아둔함 따위의 속성을 반영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930년대의 개막과 더불어 시작된 우리의 가요사에서도 소를 테마로 했거나 소의 표상을 노래의 중요한 도구로 등장시켜 활용하는 사례들이 많았습니다.
연전에 전국한우협회 관계자의 부탁으로 우리 소, 즉 한우가 등장하는 가요작품을 찾아보았더니
무려 일백여 편이 훨씬 넘는다는 중요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오늘 1938년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한 노래 ‘꼴망태 목동’(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이화자 노래)을 골라서 감상해보고자 합니다.
꼴망태 둘러메고 소를 모는 저 목동/ 고삐를 툭툭 채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이랴 흥~ 어서가자 정든 님 기다릴라/ 응~ 이랴 쯧쯧 (음메~)/ 석양산 바라보며 타령하는 저 목동/ 골통대 툭툭 털어 잎담배를 피워 물고/ 이랴 흥~ 어서가자 정든 님 기다릴라/ 응~ 이랴 쯧쯧 (음메~)/ 마을 앞 실개천에 얼굴 씻던 저 목동/ 고의춤 툭툭 털어 농구망태 다시 메고/ 이랴 흥~ 어서가자 정든 님 기다릴라/ 응~ 이랴 쯧쯧 (음메~)
이 노래에 등장하는 목동은 아마도 부잣집 토지를 대신 맡아 농사를 짓는 소작인이거나 머슴으로 보입니다. 그는 지주의 소유였던 소를 대신 관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소에게 먹이려고 풀(쇠꼴)을 잔뜩 베어서 망태에 담았군요. 고단하고 힘든 농삿일 속에서도 콧노래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아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일을 마친 다음 청년은 소를 몰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갑니다.
주인공은 옛날방식으로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서 한 모금 피우기도 하네요. 그 곰방대는 뒷등이 가려울 때 손이 안 닿는 곳을 긁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집이 가까워지자 동네어구 실개천에서 먼저 세수를 한 다음 소작인청년은 바쁜 걸음걸이로 집을 향해가네요.
각 절의 마지막 대목 ‘이랴 쯧쯧’ 다음에는 매우 특이하게도 ‘음메’ 하고 우는 소의 울음소리가 실감나는 효과음으로 들립니다. 전체 노래를 구성지게 엮어가는 기생출신 여성가수 이화자의 목소리는 어쩐지 울음을 머금은 듯 슬픔이 감지되어 옵니다. 평화와 행복의 노래가 어쩌면 이렇게도 슬픈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이 노래가 발표된 1938년은 결코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시절이 되지 못했습니다.
말이 지원병이지 실질적으로 강제징병이었던 ‘지원병제’가 실시되고, 전국적으로 주야간 방공훈련을 통한 삼엄한 전쟁분위기로 가득하며, 가족과 가정이 해체되어가던 제국주의 식민통치와 압제의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러한 평화의 노래가 나왔을까요?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소작인의 가족들은 굶는 때가 잦았고 지긋지긋한 농가부채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오죽하면 가족들을 이끌고 살길을 찾아 울면서 두만강을 넘어 도망치듯 떠나갔을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식민지시대 가요시의 대가였던 조명암(趙鳴岩, 1913~1993)의 특별하고도 따뜻한 진심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작가는 위기와 해체의 세상에서 이미 찾아보기 힘들어진 가족과 가정의 평화 및 행복의 실루엣을 고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노래로나마 대신 경험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아름다웠던 농경추억의 재생, 혹은 환기(喚起)라 일컬어도 좋을 듯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작가가 해야 할 일이지요. 그만큼 1930년대는 간고하고도 가파른 삶으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져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