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⑴최정자의 ‘처녀 농군’ 2016-07-01 농민신문

가포만 2016. 12. 12. 14:04

이동순 시인은=<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왕의 잠’(1973), 문학평론(1989)으로 등단.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발간. 2003년 민족서사시 <홍범도(전 5부작 10권)> 완간.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를 비롯해 편저 <백석시전집> 등 발간. 신동엽창작기금·김삿갓문학상·시와시학상·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충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모두가 떠난다고 다 떠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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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최정자(왼쪽)과 이동순 시인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의 대다수는 농촌이 고향이었습니다. 전체 인구의 70%가 농촌에 거주했습니다. 해마다 4월 무렵이면 농촌의 집집마다

양식이 바닥나는 절량농가(絶糧農家) 소식이 모두를 우울하게 했습니다.

바로 ‘보릿고개’란 것이었지요.

우리 한국인들은 고달픈 근현대사의 시기에 참으로 험하고 힘겨운 고개를

용케도 넘어왔습니다. ‘아리랑’고개가 그 고달픈 고개의 실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른바 사회구성체가 급격한 변동을 이루던 1960년대 말

산업화의 열풍을 타고 농촌 처녀들은 줄을 지어 도시로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이래야 고작 식모·버스 차장·

공장 노동자였습니다. 2010년 4월에는 1960년대 농촌여성의 삶과 문화를

읽게 하는 특별전 ‘서울로 온 순이들에 대한 기억’이 여성사전시관에서 열려

많은 시민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모두가 떠난다고 해서 아주 다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이른

새벽 라디오방송을 통해 들었던 한 처녀농군의 과거 회고는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습니다.

충북 영동에서 살고 있는 문순분 할머니의 사연으로, 어려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농사를 이어받았지요. 소녀는 자라서 어엿한 처녀가 되자

힘들게 일하시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직접 지게 지고 소를 몰면서 마치 남정네처럼 농사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억척스럽게 일해 주변에선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키 크고 인물도 좋고 일도 잘한다고 해서 혼처가 줄을 이었지요. 그 가운데서 가장 마음이 끌렸던 오빠 친구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하지만 액운(厄運)이란 느닷없이 당도하는 것. 그 서방님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여러 자녀를 거느리는 가장이자 농군 역할을 계속 이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젠 늙고 병들어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되었고,

그저 자신이 소처럼 일해왔던 들판만 종일 멍하게 바라다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연을 듣노라니 가수 최정자가 1968년에 발표했던 노래 ‘처녀 농군’의

장면들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네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소 몰고 논밭으로 분주히 쏘다니던 풍경이 어찌 이리도 가사 내용과 할머니의 처지가 서로 닮아있는지요.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집안의 힘든 일을 도맡아서 거뜬히 이끌어가고 있는 처녀 가장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용기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이 노래를 보내고자 합니다.

홀어머니 내 모시고 살아가는 세상인데
이 몸이 처녀라고 이 몸이 처녀라고
남자 일을 못 하나요
소 몰고 논밭으로 이랴 어서 가자
해 뜨는 저 벌판에 이랴 어서 가자
밭갈이 가자

-최정자의 ‘처녀 농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