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강변’을 불러서 우리 민족의 연인이 되었던 가수 박부용!
하지만 그녀의 이력에 대해서는 그동안 뚜렷이 밝혀진 자료가 없었습니다. 박부용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저는 여러 곳을 다녔는데, 뜻밖에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1918)이란 오래된 책을 뒤적이다가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머리를 쪽진 박부용의 사진과 약력을 발견하고 너무나 감격에 찬 나머지 혼자서 커다란 환호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은 일본인의 조선기생관광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도합 4개의 권번(券番)이 있었는데 한성권번, 대정권번, 한화권번, 경화권번이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한성과 대정이 200명 가까운 기생을 거느린 대표적 권번이었지요. 박부용은 한성권번 소속으로 17세 때 찍은 얼굴 사진과 함께 소개글이 책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읽으시는 글은 박부용의 이력에 관한 최초의 서술입니다.
기생 박부용은 1901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로 이주해서 살았지만 부친이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집안 살림은 기울었습니다. 그 때문에 박부용은 어린 시절,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는 소녀가장으로 모진 고초가 많았던 듯합니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박부용은 1913년, 불과 12세의 나이로 서울 광교조합(廣橋組合)에 기생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이때부터 독한 마음을 품고 열심히 학업에 정진해서 가곡과 가사, 경서잡가를 비롯하여 고전무용의 영역인 각종 정재무, 춘앵무, 검무, 무산향까지 모두 익혔습니다. ‘조선미인보감’에 그려진 박부용의 자태와 설명은 마치 선녀처럼 곱습니다.
한창 레코드 보급에 대한 열망으로 부풀어 오르던 1933년, 박부용은 오케레코드사로 발탁이 됩니다. 맨 처음 서도잡가인 ‘영변가’를 최소옥의 장구 반주로 홍소옥과 함께 병창으로 불렀고, 긴 잡가인 ‘유산가’를 박인영의 장구에 맞춰 불렀습니다. 이후 민요 ‘사발가’ ‘신개성난봉가’ ‘범벅타령’ ‘오돌독’ 등을 취입했습니다. 잡가로서는 ‘신고산타령’ ‘선유가’ ‘수심가’ ‘신닐니리야’ 등을 취입했습니다. 서도잡가로서는 ‘공명가’ ‘자진난봉가’, 가사로서는 ‘죽지사’ ‘수양가’ 등을 불렀습니다.
박부용이 오케레코드사를 대표하는 신민요가수로 활동했던 시기는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대략 3년 동안입니다. 이 시기 모든 신민요의 황제라 할 수 있는 ‘노들강변’은 1934년 1월에 신불출 작사, 문호월 작곡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음반은 오케레코드 창립 1주년 기념 특별호로 발매되었습니다.
노들은 ‘노돌’(老乭)에서 변화된 말로 서울의 노량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들강변은 노량진 일대의 한강 지류 강변으로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한가로운 뱃놀이가 번창했었지요. 당시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은 문예부장 금릉인, 전속작곡가 문호월 등에게 전국의 민요를 발굴·수집하도록 했습니다.
문호월(文湖月·1908∼1953)은 어느 날 만담가 신불출(申不出`본명 신상학·1907∼1969)과 함께 다른 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오던 길에 노량진 나루터에서 뱃사공의 구성진 노랫소리와 한강의 푸른 물결 위로 드리워진 봄버들을 바라보며 이 곡의 착상을 얻었다고 합니다. 끓어오르는 창작의 감흥을 이기지 못하고 곧장 강가의 선술집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제각기 곡조를 흥얼거리며 종이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문호월이 먼저 악보를 엮어 가면,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신불출이 즉시 노랫말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동순(영남대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