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8월 1일 ‘삼천리’지에 발표된 극작가 이서구 선생의 글 ‘유행가수 금석회상’에는 가수 박단마를 선배 가수 김복희의 후계자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그만큼 박단마의 대중예술가적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는 선배 비평가의 글이라 하겠습니다. 그 엄혹하던 식민지 시절에도 빅타레코드사를 통해서 무려 50여 편이 훨씬 넘는 가요곡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 가운데서 진작 예를 들었던 ‘세월아 네월아’, ‘아이고나 요맹꽁’, ‘나는 열일곱살’, ‘날라리 바람’ 등의 대표곡을 발표해서 대단한 인기를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일탈의 꿈을 꾸면서 그 꿈을 가창의 과정 속에 자유자재로 응용했던 가수 박단마의 놀라움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을 비롯해서 박단마가 불렀던 상당한 곡들이 대개 신민요풍의 노래였다는 점입니다. 신민요풍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어보면 흐느적거리는 창법, 가락을 짐짓 밀었다가 당기는 싱코페이션(syncopation) 창법을 자유분방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박단마가 구사했던 그 창법이 바로 스윙, 래그타임의 재즈창법이 보여주는 특성과 부드럽게 배합될 수 있었습니다.
가수 박단마의 진정한 삶은 8`15광복과 더불어 펼쳐집니다. 김해송이 주도하던 K.P.K악단과 이익이 주도하던 샛별악극단 등에 참가하면서 박단마는 발랄함이 느껴지는 독특한 율동과 애교스런 창법, 귀염성스런 가창으로 청년세대들로부터 대단한 반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K.P.K악단에서는 주한미군을 위한 무대공연을 자주 열었는데 주 멤버로 활동하던 박단마는 여기서 미국의 재즈곡과 팝송들을 멋지게 불러서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슈샨 슈샨보이 슈샨 슈샨보이/ 슈슈슈슈 슈샨보이 슈슈슈슈 슈샨보이
헬로 슈샤인 헬로 슈샤인/ 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아무리 피난터에 허둥거려도/ 구두 하나 깨끗하게 못 닦으시는
주변 없고 배짱 없는 고림보 샌님은/ 요 사이 아가씨는 노 노 노 노굿이래요.’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심신의 깊은 상처와 유린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던 한국인들에게
박단마가 불렀던 ‘슈샤인보이’는 위로와 용기를 주면서 크게 히트했습니다.
박단마와 다정하게 지냈던 초창기 디자이너 노라노 씨는 박단마의 추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명동의 시공관에서 열리는 박단마 1인의 라이브 쇼를 위해 나는 타프타 벨트가
달린 검은색 빌로도 드레스와 구슬을 목 밑으로 늘어뜨린 것을 디자인했다.
무당부채를 들고 나타난 그녀는 느릿한 가락으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부르다가 갑자기 갓을 벗어던지며 ‘슈슈 슈슈 슈샤인보이!’하고 빠른 템포의 노래로 넘어갔다.
그 순간 극장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수 있었던 박단마야말로 천재적 가수이자 진정한
쇼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단마는 그녀가 사랑에 빠졌던 미군 헌병장교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옮겨가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떠나온 고향이 너무도 그리워 1957년 귀국해서 ‘박단마그랜드쇼’를
구성하고 전국 순회공연을 개최합니다.
당시 공연의 슬로건은 ‘17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스테이지쇼의 프리마돈나
박단마 귀국가요제 쇼’였습니다. 1977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박단마 독집 LP음반이 발매가 되었지만 이미 박단마는 대중들에게 잊어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1992년, 71세의 할머니가 된 가수 박단마는 미국 애틀랜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