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3 대중예술의 두 장르를 넘나든 가수, 강홍식

가포만 2017. 4. 1. 19:02

"봄은 왔네 봄이 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나물 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 가네/ 산들 산들 부는 바람 아리랑타령이 절로 난다. 흥…"
1934년 발표된 '처녀총각', 이 한 곡으로 강홍식은 배우 경력을 가진 인기 레ㅗ드 가수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가수 강홍식(1902∼71)은 맨 처음 배우로서 출발하였다. 식민지 조선에 영화산업이 처음 들어왔을 때 평양 갑부의 아들이었던, 명석한 청년 강홍식의 가슴 속은 이미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예나 제나 그렇겠지만 어떤 일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는 인물들은 거의 하나같이 부지런하며 적극적인 마인드를 가졌던 듯하다. 이런 점에서는 강홍식도 예외가 아니어서 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무단가출을 했고, 바로 일본으로 도망치듯 떠나가서 오페라 극단의 견습생, 배우생활 등 영화 동네에서의 밑바닥을 체험했다. 마치 환한 불빛을 보고 멀리서 나방이 홀린 듯이 달려가듯 영화라는 신문물에 대한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를 길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강홍식의 피와 가슴을 격정 속에 빠트린 것일까.

강홍식이 태어난 1902년은 우리 민족이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을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 식민지 제국주의자들의 조직적 유린과 수탈에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맡기고 있던 시대였다. 무엇이든 배워야 살고, 무엇이든 벌어야 끼니를 이을 수 있던 위기감이 팽배하던 시절, 이러한 때 강홍식에겐 영화야말로 위기를 돌파하게 해줄 수 있는 진정한 통로라는 신념이 들었는 지도 모른다.

이러한 강홍식에게 여러 대중 예술장르 중 가장 잘 어울리고 기질과 취향에 잘 들어맞는 역할이 생겼으니 그것이 곧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다. 공연 중 막과 막 사이의 빈 여백을 막간(幕間)이라 하는데, 이때 관객들은 무료했다. 이 무료함을 즐거움으로 바꾸어주는 역할이 바로 막간가수였다. 굵은 남저음 바리톤으로 막간에서 부르는 강홍식의 노래에 대하여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만큼 강홍식의 음색에는 묘한 여운이 들어있었다. 잃어버린 정겨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랄까. 본질에 대한 애착을 환기시켜주면서 동시에 회복에 대한 강렬한 염원으로 끓어오르게 만드는 작용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강홍식 창법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강홍식이 가수로서 본격적인 취입과 활동을 하게 된 것은 물론 일본의 유수한 레코드 회사들이 서울에 지점을 열기 시작한 그 직후의 일이다. 강홍식은 1933년 4월 포리돌레코드사에서 유행가 '만월대의 밤'(왕평 작사, 김탄포 작곡, 포리돌 19060)을 첫 작품으로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로 데뷔하였다. 이어서 빅터레코드사로 옮기면서 그의 가수 생활은 더욱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삼수갑산'이 뜻밖에 히트하면서 가수로서 강홍식의 주가는 한층 높아졌다. 이때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이적을 제의해 왔고, 33년부터 36년까지 세상은 온통 강홍식의 무대였다.

특히 구성진 전통적 색조의 가락과 유장한 느낌으로 실실이 이어져가는 독특한 여운 및 그러한 정서를 재치 있게 활용한 노래 '처녀총각'은 당시 피로한 식민지 백성들에게 크나큰 위안과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전국 어디를 가든 강홍식이 부른 '처녀총각'을 흥얼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34년 2월에 발매되었던 유행가 '처녀총각'(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콜럼비아 40489). 이 한 곡으로 강홍식의 위상은 배우 경력을 가진 인기 레코드 가수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노래는 당시 극단 단성사의 음악 담당이었던 김준영의 남다른 센스와 솜씨로 만들어졌다. 서울 국일관 뒤의 어느 여관에서 극단 멤버들이 술을 마시며 시간을 즐길 때 술에 취해 거나한 강홍식이 콧노래로 '흥타령'을 불렀다. 이를 너무나 재미있게 들었던 김준영이 즉시 악보에 옮겨서 '처녀총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새싹이 돋고 훈풍이 볼을 간질이는 삼사월 봄날, 은근하고 구수한 전통적 색조가 물씬 느껴지는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그 봄이 더욱 흥겹고 즐거워지는 것이다. 이 음반은 무려 10만장 넘게 팔려나갔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난 매상이 아닐 수 없다. 옛 가요 '처녀총각'은 현재 남북한 모두 즐겨 부르는 노래로 분단을 뛰어넘은 몇 안 되는 가요작품 중 하나이다. 당시 어느 잡지사에서 조사한 인기투표에서 강홍식은 서열 3위에 올랐다.

34년 이후 강홍식의 대표곡으로는 '이 잔을 들고'(김안서 작사, 신진 작곡, 콜럼비아 40491) 등 10여곡이 넘는다. 작사가로서는 '범오'란 예명을 썼던 시인 유도순·김안서 등과 주요 콤비였다. 작곡가로서는 주로 김준영과 단짝을 이루었다.

참으로 씩씩한 곡조와 경쾌한 테마로 구성된 '먼동이 터 온다'(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콜럼비아)는 대표곡 목록에서 빠뜨릴 수 없다. 이 노래는 동해안 작은 어촌의 아침풍경을 민요풍으로 만든 네 박자로 만들어졌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남정네와 그들을 기다리는 포구의 여인네들을 다룬 아름다운 한 폭의 서정적 풍경화다. '청춘타령'(유도순 작사, 김준영 작곡, 콜럼비아 40610)도 대표곡 목록에 반드시 넣어야 한다. 강홍식이 남기고 있는 노래 중 신민요 계열의 작품이 상당수이다. 그것은 강홍식의 구성진 창법과 가장 잘 배합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강홍식의 노래는 차츰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전문 가수들의 활동이 뚜렷하게 강화되면서 연극, 영화 등과 장르를 넘나드는 가수들은 현저히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게다가 트로트 음악이 전체 가요계를 휩쓰는 풍토 속에서 강홍식의 실실이 늘어지는 듯한 타령조와 전통적 색조가 느껴지는 창법은 비정하게 주변부로 밀려나고 말았던 것이다. 세월에 떼밀리게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인기의 중심에서 멀어진 가수 강홍식은 연극영화계로 다시 복귀를 시도하지만 그곳도 이미 자신이 설 자리는 없었다. 남북이 분단된 직후 고향인 평양으로 떠나간 강홍식은 당시 아무런 콘텐츠도 갖추지 못한 궁벽한 북한영화계의 개척자로서 새로운 꿈과 열정을 펼치게 되었다. 그는 북한영화의 기초를 닦아놓고 1971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