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삶의 분별을 일깨우는 노래 ‘앵화폭풍’-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2016.04.01 논객닷컴

가포만 2016. 12. 19. 11:36

매서운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봄이 왔습니다. 생강나무, 산수유 꽃이 노랗게 만발하더니 그 뒤를 이어서 개나리, 벚꽃이 피어납니다. 그와 동시에 도시 근교의 과수원에는 복사꽃, 배꽃, 자두꽃이 벙글기 시작합니다. 산에는 진달래, 노루귀, 양지꽃이 어여쁜 자태를 뽐냅니다. 가히 꽃들의 릴레이 경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이 나라 삼천리강토는 온통 봄꽃들의 화려한 잔치입니다. 경남 진해에서는 벌써 군항제(軍港祭) 소식도 들려오네요. 군항제는 반드시 벚꽃이 가장 만발한 시기에 열립니다. 오늘은 벚꽃과 관련된 노래 하나를 골라서 그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1938년 오케레코드사가 발표한 앵화폭풍 음반 ©문화콘텐츠닷컴

창경원 벚꽃놀이 실감나게 그려낸 1938년 가요 ‘앵화폭풍’

1938년 오케레코드사는 특이한 제목의 음반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제목은 ‘앵화폭풍’(櫻花暴風).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가수 김정구가 걸쭉하고 구성진 음색의 만요 스타일로 불렀습니다.

여기도 사꾸라 저기도 사꾸라
창경원 사꾸라가 막 피어났네
늙은이 젊은이 우글우글 우글우글

얼씨구 좋다 응 꽃 시절일세 헤헤이
처녀 댕기는 갑사나 댕기
총각 조끼는 인조견 조끼
밀어라 당겨라 잡아라 놓아라
두둥실 흥 꽃이로구나
일천간장 다 녹이는 꽃이로구나

낮에도 사꾸라 밤에도 사꾸라
창경원 사꾸라가 막 피어났네
혼 나간 범나비 너울너울 너울너울
얼씨구 좋다 응 꽃 시절일세 헤헤이
영감 상투는 삐뚤어지고
마누라 신발은 도망을 쳤네
영감 마누라 꼴 좀 보소
어헐싸 흥 꽃이로구나
싱긋벙긋 껄껄 웃는 꽃이로구나

홀애비 사꾸라 쌍둥이 사꾸라
창경원 사꾸라가 막 피어났네
동물원 친구들 웅성웅성 웅성웅성
얼씨구 좋다 응 꽃 시절일세 헤헤이
신사 모자는 찌부러지고
아가씨 치마는 쭉 찢어졌네
저 거동 좀 봐요
춘당정 흥 꽃이로구나
어헐씨구 창경원에 꽃이로구나
 -가요 ‘앵화폭풍’ 전문

제목의 앵화(櫻花)는 바로 벚꽃을 가리킵니다. 사꾸라(さくら)는 벚꽃의 일본말입니다. 전체가사에는 1922년부터 해마다 열려온 ‘창경원 밤 벚꽃놀이’의 풍속도가 실감나게 담겨 있습니다. 창경원(昌慶苑)은 원래 조선왕조의 유서 깊은 창경궁(昌慶宮)이었는데, 1909년 한국을 그들의 식민지로 경략하기 시작한 일제는 조선왕조 궁궐의 전각을 마구 헐어내고 그 자리에다 동물원을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통로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왕벚나무 묘목을 1000그루나 심어서 일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벚꽃 길을 조성했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이른바 ‘벚꽃 하나미(花見)’ 행사가 열렸는데 이 행사는 맨 처음 일본인 중심으로 하다가 1924년부터 식민지 백성들에게도 공개하는 ‘창경원 야앵회(夜櫻會)’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벚꽃이 만발하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 무렵이면 이를 보기 위해 서울시민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창경궁 일대가 온통 아수라장이 됐다고 합니다.

1969년 4월21자 경향신문에 소개된 창경원 벚꽃놀이 풍경. ‘회갑 맞은 창경원’이란 제목의 사진기사에는 “궁중놀이터가 서민에게 공개되어 겨레의 수난을 함께하며 커 왔다”고 적혀 있다. ©경향신문/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벚꽃 보려다 구겨지고, 삐뚤어져도 사람들은 싱글벙글

일단 노래가사를 음미해 보면 전체에서 그 인파의 밀고 당기는 북새통과 아우성이 생생한 현장감으로 다가옵니다. ‘밀어라 당겨라 잡아라 놓아라’란 대목에서 우리는 당시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밀며 당기는 현장의 모습과 아우성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늙은이 젊은이가 한 자리에 모여서 우글우글하다며 대혼란의 현장을 실감나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십시오. 사람들은 하나같이 창경원 벚꽃구경 간답시고 남녀노소 제각기 새 나들이 복장으로 외양을 뽐내고 있습니다. 처녀들은 고급 갑사댕기로 멋을 내고, 총각들은 새로 개발된 값 비싼 인조견 조끼를 입고 있네요. 그런데 그 외모가 밀고 당기고 잡고 놓는 뒤범벅 속에서 본연의 매무새는 다 ‘구겨지고, 삐뚤어지고, 도망치고, 찌부러지고, 찢어져’ 영 꼴이 말이 아닙니다. 영감님 상투는 어찌해서 그렇게도 비뚤어져 있나요? 상투 위의 망건과 갓은 어디로 달아난 것입니까? 이미 여러 잔 마신 술에 눈동자도 풀어지고, 갈 지(之)자 걸음으로 비틀거리고 계시네요. 함께 꽃놀이 온 마나님 새로 산 고무신 한 짝은 어디서 잃어버린 것인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워낙 붐비는 인파 속에서 그 잃어버린 고무신 한 짝은 찾을 길이 막연합니다.

사태가 이렇듯 심상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감님 내외는 그저 기분이 좋아서 싱글벙글 합니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지팡이까지 멋스럽게 차려입은 저 신사는 그야말로 젠틀맨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그도 이미 술에 취해서 반듯해야 할 고급 중절모가 걸레처럼 마구 구겨져 있네요. 아가씨가 오늘따라 창경원 나들이 온다고 특별하게 사 입었던 양장치마가 무슨 뾰족한 물건에 걸려서 아랫단이 찢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요, 앞뒤 순서가 무질서하게 뒤바뀌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정상적 시간과 분별, 순리를 상실해버린 지 오래라 혼란과 파탄, 무질서와 냉혹한 현실만 그들 앞에 내팽개쳐져 있을 뿐입니다.

©픽사베이

나라 빼앗기고도 사꾸라에 취한 속중들…‘혼나간 범나비’로 풍자

그런데 동물원의 우리 속에 갇힌 짐승들이 거꾸로 인간의 꼬락서니를 보고 걱정스러운 나머지 그들끼리 웅성거립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것들이 평소엔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오늘은 어찌 저리도 못나고 우매한 꼴을 하는 것일까? 어떤 동물들은 혀까지 끌끌 차는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몽매한 대중들을 향해 매섭게 한방 먹입니다. 그 얼빠진 속중(俗衆)들의 꼴을 ‘혼나간 범나비’로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들 영혼이 빠져 달아난 무지하고 몽매한 바보들의 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래가사 전체를 음미해 보노라니 사꾸라라는 말이 보통 이상의 의미로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일제는 사꾸라 꽃을 그들의 침략전쟁에 활용했습니다. 이미 19세기부터 일제는 젊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의 꽃으로 써왔지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이른바 자살특공대였던 카미카제 병사들을 피어있는 사꾸라 꽃에 비유했습니다. 카미카제 병사들이 타고 출격하는 전투기에는 벚꽃을 새겼고, 떠나는 병사들을 전송할 때 여학생들은 사꾸라 꽃을 꺾어서 병사들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병사들의 죽음을 가리키는 산화(散華)란 단어도 매우 소름끼치는 낱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단어에서 화(華)는 바로 사꾸라 꽃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더불어 사꾸라의 또 다른 뜻으로는 사기꾼, 남을 속이는 사람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한길에서 장사치 혹은 야바위꾼들이 고객을 끌기 위해 손님으로 가장시켜 물건을 사게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부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정치판에서 이 사꾸라라는 말이 변질되어 빈번히 사용되기도 하지요.

앵화폭풍을 부른 가수 김정구 ©이동순

식민지 백성들의 얼빠진 모습, 올바른 자세 매섭게 일깨워

이 노래가 음반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1938년입니다. 그해 2월에는 지원병제도 발표가 있었고, 이미 실시해오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전국에서 산발적 저항이 잇따른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언론에서 보입니다. 일제는 한국인의 숨통을 더욱 옥죄는 방식으로 조선근로보국대 조직, 등화관제 규칙, 조선중요광물 증산령, 조선사상보국연맹 따위의 수상한 조직과 시행령을 시시각각 쏟아냈습니다.

군국주의체제가 한층 강화되면서 질식할 것 같은 식민지후반기의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시대적 고통을 소낙비처럼 온몸으로 겪고 있던 피지배 민중들의 현실은 이렇게도 한심하고 꼴불견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전혀 모르고, 현실 따위는 아랑곳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일제가 심어놓은 사꾸라 꽃을 보면서 술에 취해 히죽이 바보스럽게 웃고 있는 우매한 속중(俗衆)의 민낯을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참으로 민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노래가사 전체를 음미하면서 특히 당시 식민지백성들의 얼빠진 모습을 유심히 지켜봅니다. 젊은이들에게 모든 것의 모범이 되고 삶의 훌륭한 선례가 돼야 할 노년 기성세대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대혼란의 현장에 앞장서서 흐트러진 꼴을 보이고 있군요. 가정의 무게중심으로 우뚝하게 자리해야 할 노부부가 어인 창경원 벚꽃놀이로 뜬금없이 무리한 걸음을 하다가 상투가 비뚤어지고, 치마가 찢어지며 모자조차 모두 찌그러졌겠습니까? 이는 당시 삶의 중심을 심하게 벗어난 주민들의 중심이탈 현상과 그 참담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고발적 세태풍자의 그림이라 하겠습니다. 현실의 위기를 응시하고 있는 가요시 작가 조명암(趙鳴岩, 1913~1993)의 걱정스런 표정과 염려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합니다.

인간이라면 인간으로서의 품격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야 비로소 존경 받을만한 기본위상에 값하지 않겠습니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가려서 실행하는 그야말로 책임 있는 세대들의 냉정한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입니다. ‘곱게 늙는다’라는 말은 분명 인격에서 덕망의 향내가 풍겨나는 듬직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노래는 오늘의 우리가 살아가야할 올바른 자세를 매섭게 일깨워주는 교훈적 가치를 지니며 새롭게 다가옵니다.[논객닷컴=이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