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5] '진주라 천리 길' 을 불렀던 이규남

가포만 2017. 3. 6. 18:51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5] '진주라 천리 길' 을 불렀던 이규남




여러분께서는 '진주라 천리 길'이란 노래를 기억하시는지요? 낙엽이 뚝뚝 떨어져 땅바닥 이곳저곳에 굴러다니는 늦가을 무렵에 듣던 그 노래는 듣는 이의 가슴을 마치 칼로 도려내는 듯 쓰리고도 애절하게 만들었지요. 1절을 부른 다음 가수가 직접 중간에 삽입한 세리프를 들을 때면 그야말로 눈가에 촉촉한 것이 배어나기도 했답니다. 오늘은 식민지 후반기의 절창으로 손꼽히는 '진주라 천리 길', 이 노래를 불렀던 가수 이규남(李圭南;1910∼74)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끌러놓고자 합니다.

가수 이규남은 1910년 충남 연기군 남면 월산리에서 출생했습니다. 본명은 윤건혁이고, 가수로서의 예명은 이규남과 임헌익, 두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자료에 나타나는 세 이름을 혼동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하기도 하지요. 일찍이 서울로 올라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의 도쿄음악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할 정도로 가정환경이 비교적 넉넉했던 듯합니다.

이규남, 그러니까 본명으로서의 윤건혁이 일본에 유학한 지 3년째 되던 해, 집안은 기울기 시작해 일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윤건혁은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와 서울에 머물며 성악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맹렬한 연습을 했습니다.

1932년 윤건혁은 일본의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조선보를 통해 몇 곡의 노래를 취입했는데, 당시 노래들은 대개 서양풍의 클래식한 분위기였으며, 이 작품을 임헌익이란 예명으로 발표했습니다.

윤건혁은 1933년에도 왈츠풍의 '봄 노래'를 비롯하여 '어린 신랑' '깡깡박사' '빗나는 강산' 등과 신민요풍의 노래를 발표합니다. 이 과정에서 윤건혁은 대중음악이 지닌 보편성과 고유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윤건혁은 가슴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성악에 대한 열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일본에 가서는 바리톤 분야에서 성악을 수련했습니다. 이때 일본의 콜럼비아레코드 본사에서는 윤건혁의 음악적 재주를 남달리 주목하고 음반 취입을 권유했는데, 경제적으로 곤궁한 처지에 있던 윤건혁은 이를 즉시 수락하고 '북국의 저녁' '선유가' '황혼을 맞는 농촌' '찾노라 그대여' 등이 수록된 2장의 SP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윤건혁의 활동과 존재는 자연스럽게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계에도 알려졌습니다.

1935년 7월 초순 일본 유학중이던 성악가 세 사람이 조선일보 주최 음악회에 초청을 받아 출연하게 되는데, 이때 윤건혁도 김안라·김영일·장비 등과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미 윤건혁의 일본 데뷔 사실을 알고 있던 서울의 빅터레코드사에서는 작곡가 전수린을 앞세워 마침내 윤건혁과 전속계약을 맺습니다. 이렇게 하여 윤건혁은 아예 서울에 머물며 빅터레코드사 전속가수로서 새 삶의 출발을 하게 됩니다.

1936년은 윤건혁이 이규남이란 이름으로 서울에서 대중가수로서 첫 데뷔를 했던 해입니다. 서양의 성악을 정통이라 여기며 대중음악에 대한 경멸을 갖는 사례는 예나 제나 마찬가지이지요. 윤건혁의 경우도 그러한 편견을 끝까지 갖고 있다가 마침내 대중음악으로 방향을 수정하고 말았습니다. 그 까닭은 아무래도 경제적 이유가 앞섰겠지만 그것보다도 '유행가'라는 장르에 대한 식민지 대중들의 뜨거웠던 반응을 확인했던 것이 가장 커다란 배경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한 주저와 갈등의 과정이 예명에서 느껴지는 듯합니다. 이제는 윤건혁이란 이름보다도, 이규남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가수 이규남은 빅터레코드 전속이 되어서 1936년 한 해 동안 무려 19곡의 유행가 가요작품을 발표합니다. '고달픈 신세'가 데뷔곡이었고, '봄비 오는 밤' '나그네 사랑' '봄노래' '가오리' '내가 만일 여자라면' '명랑한 하늘아래' '주점의 룸바' '한숨' '아랫마을 탄실이' '사막의 려인(旅人)' 등이 바로 그 곡목들입니다. 이러한 노래의 작사를 맡은 사람은 강남월·고마부·전우영·홍희명·고파영·김팔련·김벽호·김포몽·이부풍·박화산·김성집·김익균·이가실 등이었고, 작곡은 거의 대부분 전수린과 나소운이 맡았습니다. 천일석·김저석·이기영·임명학·이면상·문호월·석일송 등도 함께 활동했던 작곡가입니다.

여기서 나소운(羅素雲)이란 이름을 각별히 확인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나소운은 바로 너무도 유명한 작곡가이자 수필가였던 홍난파(본명 홍영후;1898∼1941))의 또 다른 예명이지요. 홍난파는 대중음악 작품을 발표할 때 나소운이란 예명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규남의 노래에 특별히 다수의 작곡을 맡은 까닭은 홍난파가 서양음악을 전공하던 후배 이규남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빅터사에서 이규남과 함께 듀엣으로 취입했던 여성가수는 김복희였고, 박단마·황금심·조백조 등과도 친분을 가졌습니다.

이규남은 1937년에도 빅터사에서 스무편가량의 가요작품을 취입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이 유행가 작품이고, 신민요 작품도 더러 있었지요. 일본 빅터사에서는 이규남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가 그해 7월에 '미나미 구니오(南邦雄)'란 일본 이름으로 유행가 '젊은 마도로스'를 발표하게 하는데, 이 작품은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규남은 1940년까지 빅터사에서 수십여편의 가요작품을 취입 발표합니다. 한 가지 눈여겨 볼 점은 이 시기에 이규남이 '골목의 오전 7시' '눅거리 음식점' 등과 같은 만요를 발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규남의 창법과 음색의 특징이 광범한 보편성을 지녔고, 어떤 노래를 취입해도 소화를 잘 시켰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1941년 이규남은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겨서 신가요 '진주라 천리 길'(이가실 작사, 이운정 작곡, 콜럼비아 40875)을 발표합니다.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나라의 주권을 잃고, 군국주의 체제의 시달림 속에서 허덕이는 식민지 백성들은 이 노래 한 곡으로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서러움과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 작품은 분단 이후 줄곧 금지곡 목록에 들어있었는데, 그 까닭은 작사자·작곡가·가수 모두 북으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이가실은 조명암의 예명이요, 이운정은 이면상의 예명입니다. 일제말에 인기가 높았던 이규남은 친일가요를 취입하는 일에 강제동원이 되었습니다.

1950년 이규남은 북으로 가서 내무성 예술단 소속으로 가수로서의 활동을 이어갑니다. 북한에서는 작곡과 무대예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두각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북한의 가요사 자료는 1974년 이규남이 사망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남과 북은 갈라져 있지만 '진주라 천리 길'의 애절한 가락과 여운은 지금도 우리 귀에 잔잔히 남아있습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