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4] 식민지 갇힌 삶을 노래한 신카나리아 영남일보 2008-02-14

가포만 2017. 3. 6. 18:52

한국가요사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가수들로서 나이 여든이 넘도록 장수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생존인물로는 올해 93세의 나이로 단연 장수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반야월(진방남), 갓 아흔을 넘긴 작곡가 이병주를 먼저 손꼽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수년 전 94세로 세상을 떠난 가수 신카나리아(본명 申景女:1912∼2006)를 손꼽을 수 있다. 가요계의 원로 중에 여든을 넘긴 분도 그리 흔하지는 않다. 손인호, 금사향, 신세영 등이 모두 여든을 넘겼다. 반야월은 청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방송 출연을 아예 사절하고 있는 형편이나, 신카나리아는 아흔까지 무대에 섰던 놀라운 가수로 기록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너무 노쇠한 신카나리아의 모습에 놀라움보다는 탄식과 비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신경녀는 191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원산은 한국음악사에서 대표적 거장들을 배출한 유명한 고장이다. 김용환, 김정구, 김정현, 김안라 등 대중음악계의 뛰어난 음악인 형제들도 원산 출생이다. 유명한 성악가 이인범, 이인근, 이옥현 남매들을 비롯해 작곡가 이흥렬도 원산이 고향이다. 어릴 적 신경녀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고 한다. 막내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건만 원산의 루시여자고보를 1학년까지 다니다 결국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음악적 재능을 달랠 길 없어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테너 이인근의 누이동생 이옥현에게 성악의 기초를 지도받았다.

신경녀의 나이 16세 되던 해, 극작가 임서방(任曙昉)이 이끌던 이동악극단 성격의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가 함흥지역에서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원산의 유일한 극장시설인 원산관으로 들어왔다. 신경녀는 날마다 조선예술좌 배우와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다녔고, 그들의 연기와 노래에 도취되었다. 신경녀는 기어이 무대 뒤로 용기를 내어 임서방을 찾아가 대중예술인이 되고 싶은 자신의 뜻을 밝혔다. 신경녀의 자질을 테스트 해본 단장 임서방은 맑고 깨끗한 음색과 귀염성스러운 자태에 호감이 느껴졌다. 신경녀의 노래는 마치 새장 속에서 들려오는 한 마리의 어여쁜 카나리아가 들려주는 아름다움과 같았다. 그리하여 조선예술좌 합류를 흔쾌히 수락하고, 이후 맹렬히 연습을 시켰다. 물론 이 발탁의 과정에는 임서방 개인의 취향과 특별 배려가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해서 신경녀는 무대 위에서 신카나리아로 불렸고, 조선예술단과 신무대악극단의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 혹은 막간가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신카나리아의 첫 데뷔곡은 17세에 취입한 '뻐꾹새'와 '연락선'이란 노래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중들의 반향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정숙이 불렀던 '낙화유수'('강남달'의 원래 제목), '강남제비' 등을 악극단의 막간 무대에서 신카나리아가 너무도 애절한 음색으로 불러 오히려 원곡을 부른 가수보다 더욱 인기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신카나리아의 나이 20세가 되기까지 노래와 연기를 동시에 겸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듯하다. 1932년 동아일보의 기사 한 토막은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연극시장에서 아직까지도 아모 지장이 없이 곱게 피고 있는 방년 십칠 세의 귀여운 존재 … 신카나리아양은 산골짝에서 졸졸졸 흐르는 냇물소래의 리듬처럼 청아한 목소리를 가졌다. … 연기에 있어서는 세련되지 못하였으나 대리석으로 깎아낸 듯 곱고도 정돈된 그의 얼굴이 스테지에 나타날 때에는 관객의 시선은 그의 연기보다도 미모에 집중되는 경향이 잇다.'



19세 이후로 신카나리아가 가수로서 발표한 작품의 제목은 '한숨고개' '사랑아 곡절업서라' '무궁화 강산' '웅대한 이상' '공허에 지친 몸' '눈물 흘니며''옛터를 차저서' '돌녀주서요 그 마음' '사랑이여 굽히자 마소' '월야의 탄식' '원수의 고개' '밤엿장사' '꽃이 피면' '님 생각' '선창의 부루스' '상해 여수' 등이다. 이 가운데서 '무궁화 강산'(전수린 작사, 전수린 작곡)이란 노래는 광복 이후 '삼천리강산, 에헤라 좋구나'로 제목이 바뀌었고, 신카나리아가 무대 위에서 항시 즐겨 부르던 자신의 애창곡이었다. 일제강점 체제에서 '봄' '무궁화' '삼천리강산' 등의 단어들이 결코 사용해서는 안되는 금기어(禁忌語)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 노래의 의미는 새롭게 부각된다 할 것이다.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아라/ 아까운 이내 청춘 다 늙어 가누나

강산에 새봄은 다시 돌아오고/ 이 가슴에 새봄은 언제나 오나요

세월은 한 해 두 해 흘러만 가구요/ 우리 인생 한 해 두 해 늙어만 가누나

(후렴)삼천리 강산에 새봄이 와요/ 무궁화 강산 절계 좋다 에라 좋구나



신카나리아가 주로 음반을 발표했던 레코드회사는 시에론레코드였다. 가수 신카나리아에게 노랫말을 주었던 작사가는 천우학, 김희규, 전임천, 임창인, 유일, 임서방, 유도순, 노자영 등이다. 이 가운데 유도순과 노자영(노춘성)은 식민지 조선시단에서 활동하던 낭만주의 계열의 현역시인들이다. 임서방은 줄곧 신카나리아의 매니저 겸 후견인으로 도움을 주던 끝에 결국 부부가 되었다. 신카나리아 노래의 작곡을 담당하던 대중음악인은 유일, 전수린, 안영애, 이재호 등이다.

시에론레코드에서 활동하던 시절, 신카나리아는 신은봉과 더불어 시에론 최고의 음반판매수를 자랑하는 대표적 위치를 차지했다. 당시 12인치 음반 한 장의 가격이 1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카나리아의 음반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대중들의 인기를 집중시킨 음반을 당시 용어로는 '절가반(絶佳盤)'이라 불렀다. 이 용어는 실제로 음반 상표에 표시되기도 했는데, 신카나리아의 음반에는 이 '절가반'이 여러 장이나 있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업고 신카나리아는 요즘의 만담과 비슷한 스켓취, 혹은 난센스 종류의 음반도 가끔 취입하다가 1934년 리갈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겼다. 리갈은 보급판 스타일의 저렴한 민요 음반을 집중적으로 발매하던 콜럼비아의 계열회사였다.

1938년 이후 신카나리아는 음반 발표보다 악극단 공연에 더욱 열정을 쏟았다. 빅타레코드사의 악극단, 중국 톈진의 악극단, 신태양악극단, 포리도루실연단 등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김해송이 주도하던 KPK악극단 멤버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후견인이던 임서방과 이별하고, 이익(예명 김화랑)과 재혼하였다. 신카나리아 부부는 새별악극단을 창립하여 전국을 순회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신카나리아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 장병위문단의 멤버로 군부대 위문공연에 열중하였다.

1972년 회갑을 넘긴 신카나리아는 서울 충무로에서 '카나리아다방'을 열고 옛 동료가수들과 어울려 추억담을 즐겨 나누며 소일하였다. 한국가요사에서 처음으로 예명을 썼다는 가수! 소녀 같은 단발머리에 한복차림이던 신카나리아! 그 특유의 간드러진 음색으로 90세까지 기꺼이 무대에 오르던 직업적 천품(天稟)의 가수는 마침내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녀가 남긴 노래들은 거의 대부분 식민지라는 감옥에 갇힌 백성들의 슬픈 삶을 다룬 것이었다. (영남대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