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9] 두만강의 한을 노래한 김정구 영남일보 2007-11-29

가포만 2017. 3. 6. 19:03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이노래는 김정구(金貞九)가 불렀던 '눈물 젖은 두만강'(김용호 작사, 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 오케 12094)의 한 대목입니다. 옛 노래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도 이 노래 한 소절쯤은 대개 곡조를 흥얼거릴 줄 압니다. 더불어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가 왜 지금까지도 애타게 두만강을 목놓아 불러야 하는가를 저절로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이 노래를 목청 높여 부르노라면 일제의 등쌀에 못 이겨 기어이 눈물의 강을 넘어가야만 했던 식민지 시대 주민들의 삶과 애환이 눈앞에 환히 보이는 듯합니다. 남북으로 두 동강난 국토의 애달픔과 그 속사정도 귀에 쟁쟁 들리는 듯합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러가도록 두만강은 여전히 피눈물의 공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소스라치게 깨닫게 됩니다. 노래 한 곡이 이토록 우리의 가슴을 슬픔과 탄식으로 적시고, 매운 정신이 번쩍 들도록 만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두만강은 백두산 천지의 남동쪽에서 발원하여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의 국경을 두루 거쳐 흘러갑니다. 전체 길이가 무려 500㎞가 훨씬 넘는다고 하지요. 1930년대 이 두만강 연안에는 일본군 국경수비대가 삼엄한 눈빛으로 총검을 들고 오고가는 나그네들을 모조리 검색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독립단 소속 열혈청년과 민족 운동가들은 두만강을 넘어 다니며 피 뜨거운 활동을 펼치곤 했습니다. 당시 악극단 단원들도 만주 지역의 동포들을 위해 순회공연을 떠났는데, 반드시 이 두만강을 넘어가야만 했지요. 작곡가 이시우(李時雨)가 소속된 극단 '예원좌'도 이런 악극단 중의 하나였습니다.

만주의 투먼에서 공연을 마치고 강가 어느 여관에 머물고 있던 밤, 여인의 처절한 통곡이 들렸습니다. 이윽고 날이 밝은 뒤 이시우는 그 통곡의 사연을 물었고, 여관집 주인으로부터 독립군으로 떠난 여인의 남편이 불과 1년 전 일본군 수비대의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난 내력을 전해 들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이시우는 강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사연을 담은 노래 한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눈물 젖은 두만강'이지요. 며칠 후 악극단 공연에서 한 막간가수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관중들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순회공연을 마친 뒤 이시우는 뉴코리아레코드사 소속의 가수 김정구를 찾아가 이 노래의 취입을 제의했고, 김정구는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이시우가 쓴 가사는 1절뿐이었는데, 김용호가 2절과 3절 가사를 새로 붙였습니다. 막상 음반으로 찍어내기는 했지만 판매량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총독부 경무국 당국에서는 이 음반에 대하여 발매금지 조치를 내렸습니다.

그로부터 수십년 세월이 흘러간 1970년대, 이미 원로가수가 된 김정구가 무대에서 부를 노래는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취입한 대부분의 노래가 조명암, 박영호 등 월북작사가의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눈물 젖은 두만강'만큼은 온전하게 어떤 금지에도 걸리지 않았고, 분단과 더불어 북에서 월남해 내려온 실향민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유일한 노래로 뒤늦게 유행을 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다 한 방송국에서 제작한 라디오 반공드라마의 시그널 음악으로 선택되면서 이 노래는 더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로부터 가수 김정구는 무대에 오를 적마다 이 노래를 열창했습니다.

가수 김정구는 191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습니다. 5남매 중 셋째였는데, 형제가 모두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맏형은 가수와 작곡가를 겸했던 김용환, 김정구의 형수이자 형 용환의 아내였던 정재덕도 가수로 활동했지요. 누나 김안라는 소프라노가수였습니다. 동생 김정현은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기독교 집안의 분위기가 이런 여건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들 형제는 가족노래선교단을 꾸려 동해안과 금강산 부근의 마을을 다니며 연주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김정구는 원산의 광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점에서 점원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1936년 서울로 가서 가수가 되려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김정구의 첫 데뷔는 뉴코리아레코드사였습니다. '어머님 품으로' '청춘 란데뷰' 등의 음반을 발표하고, 단번에 인기가수 명단에 오르게 되었지요. 뉴코리아레코드사는 경영난으로 1년이 채 안되어 문을 닫게 되었고, 김정구는 오케레코드사 창설의 숨은 주역인 김성흠의 제의를 받아 오케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1937년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첫 작품은 '항구의 선술집'(박영호 작사, 박시춘 작곡, 오케 1960)입니다. '부어라 마시어라 이별의 술잔/ 잔우에 찰랑찰랑 부서진 하소'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당시 청년들의 마음을 완전히 매료시켰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오케레코드사의 간판격 가수이자 인기가수로 등극한 김정구는 1937년 한 해 동안 무려 18곡이 넘는 가요를 발표합니다. 당시 부른 노래는 '황금송아지' '눈깔 나온다' '뽐내지 마쇼' '광란의 서울' '백만원이 생긴다면' 등으로 곡목만 보더라도 일그러진 식민지 현실에 대한 냉소와 풍자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런 노래를 만요풍(漫謠風)의 노래라고 합니다. 김정구가 무대에서 이런 만요풍 노래를 부를 때는 반드시 코믹한 제스처를 사용해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습니다. 당시 김정구 노래의 가사는 주로 박영호, 작곡은 손목인과 박시춘 등이 각각 전담하다시피 했습니다.

이후로 크게 히트했던 김정구의 노래는 '왕서방 연서' '총각진정서' '앵화폭풍' '바다의 교향시' '철나자 망녕' '월급날 정보' '모던 관상쟁이' '세상은 요지경' '수박행상' '낙화삼천' '뒤져본 사진첩' '장모님전 상서' 등입니다. 일제 말 조선악극단 도쿄 공연 때 김정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통한의 6·25가 일어나자 김정구는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피란내려와 떠돌이 빵장수, 지게꾼, 무대 출연 등으로 고달픈 생존을 이어갔습니다. 1975년 가수 김정구는 회갑을 맞아 성대한 기념무대를 마련합니다.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도 가수로서 맨 처음 받았고, 가는 곳마다 오로지 '눈물 젖은 두만강'만이 김정구의 단골 레퍼토리였습니다.

1985년은 가수 김정구에게 매우 뜻깊은 한 해였습니다. 왜냐하면 떠나온 고향 북녘 땅에서 열리는 고향방문단 특별공연에 출연하여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북한 주민들 앞에서 목이 터져라 불렀기 때문입니다. 모든 원로가수가 하나 둘 세상을 떠나 무대에서 사라질 때 김정구는 칠순이 넘은 나이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여전히 왕성한 무대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런 모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지요. 마침내 1992년 김정구는 노환으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떠나갑니다. 진작 이민을 간 가족들 곁으로 갔습니다.

1992년 9월25일, 가수 김정구는 향년 77세로 미국 땅에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한반도의 북녘 하늘로 이승의 모든 속박과 부자유에서 풀려난 김정구의 영혼은 산새처럼 훨훨 날개를 저어 찾아갔을 것입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열창하던 김정구의 구수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