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8] 관부연락선의 비애를 노래한 장세정 영남일보 2007-11-15

가포만 2017. 3. 6. 19:04

관부연락선을 아시는지요. 관부(關釜)라면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와 한반도의 부산, 두 지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곳을 오고 가던 정기선박을 관부연락선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관부연락선이란 말 속에는 지금도 식민지 시대 우리 민족의 한과 피눈물이 흥건히 배어있습니다. 가졌던 토지를 모조리 빼앗기고 다만 절박한 생존을 위해 현해탄을 건너갔던 무수한 한국인의 상처와 슬픔이 관부연락선에 깃들여 있을 것입니다.

관부연락선이 맨 처음 운항을 시작한 것은 1905년입니다. 당시에는 이키마루라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일제는 관부연락선의 이름을 자주 바꾸곤 했는데, 그 배경에는 한반도에 대한 침략이념과 대륙정책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었습니다. 자, 그러면 관부연락선의 이름이 어떻게 바뀌어져 왔는지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요. 이키마루→쓰시마마루→우네카마루→홍제환, 고려환, 신라환→경복환→덕수환, 창경환→금강환, 흥안환→이치키마루→천산환→곤륜환 등으로 줄곧 명패를 바꾸어왔습니다. 이 관부연락선은 맨 처음 1천500t급 소형연락선으로 출발하였으나 세월이 갈수록 7천500t급 대형 선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관부연락선에 몸이 실려 떠나간 한국인들은 일본의 시나노가와 발전소, 규슈탄광, 북해도탄광 등지에서 민족차별과 인간 이하의 천대를 받으며 심지어는 학살을 당하기까지 했지요. 1923년에 일어났던 관동대지진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한국인학살사건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관부연락선은 일본의 식민지 경영과 한반도 강점의 부조리한 현실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축소판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1937년 2월, 식민지조선의 여성가수 장세정은 한 편의 기막힌 가요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연락선은 떠난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노래 가사를 보면 그저 사랑하던 연인과의 평범한 이별 장면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음미해보면 이별과 눈물의 의미가 범상치 않습니다. 그야말로 생살이 찢기는 식민지의 고통과 한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쌍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 마세요)/ 울지를 말아요.

-'연락선은 떠난다'(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장세정 노래)

징용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던 우리 동포들은 이 '연락선은 떠난다'의 구슬픈 곡조에다 슬쩍 가사를 바꾸어서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이른바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의 한 과정이었지요. 그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무엇을 원망하나 나라가 망하는데/ 집안이 망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구나/ 실어만 갈 뿐 실어만 갈 뿐/ 돌려보내 주지 않네/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연락선은 지옥선.

작사가 강사랑이 엮은 '한국레코드가요사'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성우의 대사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레코드를 전축 위에 걸어놓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들으면 관부연락선을 타기 위해 아우성치던 부산항 제2부두의 광경과 소음들이 생생하게 재현됩니다.

대사: 현해탄, 그곳은 한 많은 해협이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여기를 드나들면서 마음대로 실어가고 또 마음대로 실어다 팔았습니다. 부산항, 그 한 많은 부두에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의 한숨이 점점이 서려있고, 관부연락선 그 연락선 갑판 위에는 피눈물로 얼룩진 한 많은 사연들이 서리서리 젖어있습니다. 우리 한국인이 일본을 가려면 먼저 본적지나 거주지에 도항증명서를 내야했습니다. 이 도항증명서도 부산경찰국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오로지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도항증명서의 확인을 받아야 하고, 보따리나 몸수색을 당해야 했으며, 심지어는 구둣발로 차이며 따귀를 얻어맞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단 하나뿐인 아들을 산 설고 물 선 일본 땅으로 떠나보내야 했으니, 여기 이 노래는 그야말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 우리 민족의 처절한 삶과 한을 다룬 노래 '연락선은 떠난다'를 불렀던 가수는 장세정입니다. 그녀는 1921년 평양에서 출생하였고, 생후 두 달 만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만주에서 독립단에 들어갔다는 아버지는 소식도 없고,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났지요. 부모를 잃은 쓸쓸함을 어린 장세정은 항상 노래로써 달랬습니다. 10대 후반, 장세정은 평양 화신백화점의 점원으로 취직해 일했습니다. 백화점 안에서도 각종 음반과 축음기, 악기 등속을 판매하는 악기점 일을 보았지요.

드디어 1936년 늦가을, 장세정은 평양방송국 개국기념 가요콩쿠르 무대에 올라 자신의 노래를 대중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엄청난 박수와 환호가 터졌습니다.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이 마침 평양에 왔다가 장세정의 이런 모습과 만나게 되었고, 단번에 서울로 스카우트해 갈 결심을 했습니다. 장세정이 서울로 간 뒤 '연락선은 떠난다'와 같은 빅 히트작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철 사장의 특별한 지원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케에서는 장세정 음반을 소개할 때 '평양이 낳은 가희(歌姬)'란 문구를 꼭 넣었습니다.

흔히들 장세정 창법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죽죽 뻗어나가면서도 가볍게 코에 걸리는 달콤함을 속으로 간직한 창법, 혹은 청초한 색기(色氣)를 느끼게 하는 창법이라 하지요. 사실 장세정의 노래를 귀 기울여 들어보면 이런 표현이 실감이 됩니다. 장세정의 대표곡으로는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은' '처녀야곡' '불망의 글자' '토라진 눈물' '항구의 무명초' '잘 있거라 단발령' '역마차'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광복 이후 1948년 봄에 발표한 '울어라 은방울'(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만큼은 불후의 명곡으로 지금도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누구를 싣고 가는 서울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다.


장세정은 그녀의 노래를 너무나 사랑했던 한정식과 결혼에 골인합니다. 한정식은 아내 장세정의 무대 활동을 적극 후원했습니다. 오페라, 악극단 공연 등으로 몹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6·25전쟁이 발발했고, 장세정은 대구로 피란 내려와서 잠시 머물렀습니다. 이 무렵,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고향초' '즐거운 목장' '샨프란시스코' 등의 음반을 발매하고 히트시켰지요.

1970년대로 접어들어 장세정은 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카나리아다방에 나와서 즐거웠던 추억담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조명암, 박영호 등의 월북 작사가 작품으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장세정의 노래들은 거의 금지곡 목록에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뼈저린 아픔 속에서 장세정은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하게 됩니다. 1978년 장세정은 미국 LA에서 은퇴기념공연을 펼친 뒤, 2003년 향년 82세의 나이로 머나먼 타국에서 고단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