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6 식민지 어둠을 밝혀준 가수 박향림 2007-10-18

가포만 2017. 3. 14. 18:43

여러분께서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기억하시는지요? 그 영화의 주인공은 미남배우 장동건과 원빈입니다. 그들의 행복했던 시절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배경음악도 함께 기억하시는지요? "오빠는 풍각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라는 재미난 가사로 펼쳐지는 간드러진 목소리는 바로 박향림(朴響林)이라는 1930년대의 인기가수랍니다. 그녀가 불렀던 '오빠는 풍각쟁이'란 노래이지요.

오빠는 풍각쟁이야이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몰라이 난 몰라이/ 내 반찬 다 뺏어 먹는 건 난 몰라/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구/ 오이지 콩나물만 나한테 주구/ 오빠는 욕심쟁이/ 오빠는 심술쟁이/ 오빠는 깍쟁이야이.


빠른 비트와 랩을 즐기는 요즘 세대에게는 촌스럽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느낌도 들게 하지만 코믹한 가사와 흥겨운 리듬은 그들의 감각에도 즐거움을 주었고, 심지어 노래방 애창곡으로 떠올려지기도 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수십 년 전에 활동했고, 그동안 완전히 잊어진 가수가 무덤 속에서 환생해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가요는 그 시대 주민들의 마음 속 풍경을 고스란히 대변해준다고 합니다. 슬픔이면 슬픔, 기쁨이면 기쁨의 감정을 노래에 곡진하게 담아서 그 시대 사람들보다 먼저 대신하고 위로하며 고통을 분담해 줍니다.

이제는 흘러간 일제강점기.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며 호소할 곳도 가히 없던 시절, 당시 우리 겨레는 가수의 노래를 유성기로 들으며 한과 쓰라림을 달랬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박향림은 깜찍하고 발랄한 음색과 창법으로 어둡고 우울하기만 했던 식민지의 어둠을 몰아내고, 잠시나마 밝은 기분을 느끼도록 해주었던 가수였습니다.

가수 박향림(본명 박억별)은 1921년 함북 경성군 주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박억별이 16세 되던 1937년, 주을온천에는 온통 서울에서 온 오케연주단(조선악극단)의 연주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이런 연주단이 도착하면 다음날부터 대표 출연진을 앞세워 거리와 골목을 돌아다니며 선전을 했는데, 주민들은 가슴이 설레어 그 뒤를 줄곧 따라다니곤 했답니다. 이를 '마치마와리(町廻)'라고 했습니다. 억별은 오케연주단의 마치마와리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공연을 다 본 뒤 무대 뒤로 작곡가 박시춘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류가수가 돼서 어머님께 효도를 하고 싶어요."

이를 갸륵하게 생각한 박시춘은 그 자리에서 억별의 노래솜씨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약간 동그스름한 얼굴에 쌍거풀진 커다란 눈이 귀염성스러웠던 박억별은 목소리도 마치 은쟁반에 옥을 굴리는 듯해서 박시춘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오케연주단 이철 단장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오케레코드사엔 이미 이난영, 장세정, 이은파 등을 비롯한 최고 가수진이 풍부했기 때문이지요.

"이담에 서울 올 일이 있으면 한번 들러라.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그해 가을 박억별은 바로 서울로 올라가 오케레코드사를 찾아갔지만 더욱 냉담했습니다. 이에 화가 돋은 억별은 태평레코드사를 찾아가 오디션을 받고 즉시 채용이 됐습니다. 말 그대로 16세의 소녀가수였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박억별은 '청춘극장'과 '서커스 걸'이란 노래를 태평레코드 문예부장이었던 박영호 선생으로부터 받아 첫 데뷔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풍부한 성량에다 무언가 답답한 속을 확 트이게 하는 힘이 있었으므로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때 음반에 표시된 이름은 박정림이었습니다. 여러 곡이 히트하게 되자 박억별은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전격 스카우트됩니다. 이때부터 박억별은 박정림을 거쳐 박향림이란 예명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 무렵에 많은 노래를 취입했는데, 가장 히트한 노래로 '오빠는 풍각쟁이'를 손꼽을 수 있겠지요. 소녀가수 박향림의 간드러진 콧소리로 들려오는 이 노래는 무엇보다도 가사의 내용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일종의 코믹송입니다. 당시 세태를 너무도 실감나게 잘 반영하고 있는 좋은 노래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가사에 떡볶이, 오이지, 콩나물 등 음식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나 제나 서민들이 즐겨먹는 음식입니다. 여동생을 괴롭히는 짓궂은 오빠를 '풍각쟁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풍각쟁이는 원래 시장이나 집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돈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노래에서는 심술쟁이 오빠를 대신하는 말입니다. 지금은 국립극장으로 바뀐 옛날의 명치좌도 등장합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모주꾼, 안달쟁이, 모두쟁이, 대포쟁이란 어휘도 정겹습니다.

박향림의 인기가 워낙 높아지니까 당황한 곳은 지난날 스스로 찾아왔던 박향림을 거절했던 오케레코드사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가수들은 모조리 오케레코드사로 집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철 사장은 박향림을 기어이 오케로 이적시키고야 말았습니다. 물론 엄청난 돈이 들었겠지요. 박향림이 오케레코드로 옮겨와서 첫 취입곡으로 발표한 작품은 그 유명한 '코스모스 탄식'입니다. 이후로 발표하는 음반마다 히트가 이어지자 이철 사장은 흐뭇했습니다.

숨막힐 것 같은 암흑의 시기를 박향림은 겨우 겨우 버티어 나갔습니다. 드디어 광복이 되고 박향림은 악극단 공연에 참가해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힘겨웠던 식민지 시대를 잘 견디었던 우리 겨레를 위하여 어떤 위로라도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46년 박향림은 혼인을 했고, 배부른 몸으로 공연무대에 올랐습니다. 출산을 했지만 제대로 산후조리를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회복이 덜 된 몸으로 강원도 홍천에서 공연 무대에 올랐던 박향림은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산욕열이란 병이 박향림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세상을 하직하던 시기에 불과 스물다섯. 꽃다운 청춘으로 돌연히 이승을 하직한 박향림을 잃고 가요계는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해 7월, 박향림 추도공연이 서울 동양극장에서 열렸습니다. 공연의 이름은 '사랑보다 더한 사랑'이었고, 박향림을 너무도 아꼈던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출신의 박영호 선생이 추도사를 읽었습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