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5 '연락선은 떠난다' 의 작곡가 김해송 2007-09-20

가포만 2017. 3. 14. 18:44

김해송(金海松)이란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한국가요사에서 작곡과 노래를 함께 겸했던 특이한 사람이 이따금 나타나곤 했는데, 이 김해송이란 분이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사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긴 문화인들은 그 나라 국민들 기억 속에 오래오래 기억이 되며 사랑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경우는 식민지와 분단의 혼란 속에서 험한 세월의 풍파에 그 존재가 망실되어버린 인물이 한둘이 아닙니다. 김해송이란 이름이 여러분께 낯설게 느껴지는 까닭도 바로 6·25전쟁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김해송! 그는 너무도 뛰어난 가요작곡가이면서 동시에 가수로 활동했고, 또한 한국의 뮤지컬 역사에서 선구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1911년 평남 개천에서 태어난 김해송은 본명이 김송규입니다. 소년시절 평양 숭실전문을 다니다가 집안의 연고에 따라 충남 공주로 내려와 공주고보를 졸업했습니다. 재학시절부터 기타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날이면 날마다 기타만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전문적 기타연주자가 되고 싶은 꿈에 부풀어 김해송은 조선악극단의 지휘를 맡고 있던 작곡가 손목인을 찾아가 오케레코드사 전속연주자로 발탁이 되었던 것이지요.

1935년은 김해송이 가수로 무대에 처음 데뷔한 해입니다. 당시 24세였던 김해송은 이난영, 신일선, 고복수 등 오케레코드 전속가수들과 함께 당당히 무대 위에 올랐습니다. 레코드로 만들어진 첫 작품 '항구의 서정'(남풍월 작사, 김송규 작곡, 김해송 노래, 오케 1920)이 발표된 것은 그해 10월의 일이지요. 이 노래도 김해송이 작곡과 노래를 직접 맡았습니다. 이후로도 '우리들은 젊은이' '청춘은 물결인가' '청춘해협' '청춘쌍곡선' 등의 노래를 작곡하고 직접 불렀습니다. 틈틈이 '김해송 신작 발표회'를 열어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던 것은 물론이지요.

1937년 2월에는 최고의 음악가를 지향하는 청년 김해송에게 있어 드디어 출세의 기회가 다가왔습니다. 가요곡 '연락선은 떠난다'(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장세정 노래, 오케 1959)를 작곡해 평양 출신 가수 장세정으로 하여금 애처롭고 눈물겨운 음색으로 취입하도록 했던 것이 바로 그 기회였습니다. 노래에 대한 반향은 실로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유명 변사이던 서상필이 넉살좋게 엮어가는 사설이 듣기에 구수했습니다. 그 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대사) 여기는 항구, 추억의 보금자리/ 진정코 사랑하는 까닭에 떠나가는 그대여,/ 오! 내 얼굴엔 눈물이 퍼붓소이다,/ 잘 가시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이것은 선물이오니/ 변변치 못한 손수건이오나/ 이것으로 눈물을 씻어 주세요,/ 언제나 잊지 마시고 영원히, 영원히/ 고맙소이다, 안타까운 이별에 주고받는 선물이/ 내 장부의 가슴을 쥐어뜯는구려,/ 그대 성공하시어 조선의 디아나더빈이 되기를 바라오.



구성지게 엮어진 변사의 이런 대사가 한 바탕 쏟아지고 나면, 곧 이어서 전주곡과 함께 장세정의 애조 띤 음색이 흘러나옵니다. '부웅'하는 슬픈 뱃고동 소리도 잔잔한 배음으로 들려오는군요.



쌍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샘키면서/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 마세요)/ 울지를 말아요.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이 노래의 작곡자가 바로 김해송이란 사실은 모르셨지요? 193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식민지 백성의 처지는 가련함 그 자체였습니다. 고향집에서 가족과 편하게 배불리 먹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쉬느니 한숨이요, 내뱉느니 탄식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일본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발길이 종일 서성대는 부산항 부두에는 이별의 눈물과 쓰라린 애환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 애환의 광경을 이 노래만큼 잘 표현한 노래는 그리 많지 아니합니다. 당대 1급의 작사가 박영호 선생이 노랫말을 붙였고, 곡조의 예술성을 김해송이 맡았습니다. 이렇게 만든 노래는 삼천리 반도를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모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가슴속의 억울함과 답답함을 쓸어내렸습니다. 한 잔 술에 취하여 이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내일의 삶에 대한 염려가 새로 솟구치곤 했던 것입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 활동하던 김해송이 콜럼비아사로 옮긴 것은 1938년 일입니다. 이 한해 동안 무려 서른 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하거나 불렀습니다. 그 중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은 김해송이 만요(漫謠)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후로 발표했던 김해송의 대표곡 제목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옵빠는 풍각쟁이' '팔도장타령' '나무아미타불' '다방의 푸른 꿈' '코스모스 탄식' '우러라 문풍지' '화류춘몽' '잘잇거라 단발령' '어머님 안심하소서' '요즈음 찻집' '경기 나그네' '고향설' 등 유명곡들이 참으로 많기도 많습니다.

이 시기 김해송의 삶에서 또 하나의 놀라운 소식은 가수 이난영과의 결혼입니다. 김해송은 아내를 위해 재즈풍의 노래 '다방의 푸른 꿈'(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이난영 노래, 오케 12282)을 만들어줍니다. 그러면서 처남인 이봉룡에게 작곡기법을 가르쳐 작곡가로 성공을 시켰습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김해송은 KPK악단을 조직하여 새롭게 변화된 세상에 기민하게 대응합니다. 해방기념가요 '울어라 은방울'도 발표해서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과 더불어 김해송은 북으로 끌려올라가 영영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지요. 이처럼 전쟁은 모든 현재성을 소멸과 망각의 구렁텅이로 매몰차게 던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