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3 6·25전쟁 슬픔 다룬 '굳세어라 금순아'와 현인

가포만 2017. 3. 14. 18:46

얼마 전 벗들과 부산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방문길에서 저는 특별한 전시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획전입니다. 부산 동광동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40계단이 있지요. 바로 그 위에 지어진 40계단 문화관 전시실에서 이 기획전이 열렸습니다. 전시장에는 피란살이 설움과 망향의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한 1950년대 대표곡 앨범, 각종 공연 사진, 악극단 전단, 작곡가의 자필 악보, 가요사 관련 중요 사진 자료들, 과거의 녹음기와 축음기 등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 친필, 작곡가 김교성 선생의 친필 악보, 가수 백난아와 금사향의 친필은 귀한 자료였습니다. 이제는 거의 빛바래져가는 당시 흑백 사진들에서 낯익은 가수의 얼굴을 발견할 때는 마치 가수를 직접 대면한 듯 가슴속은 흥분과 감격으로 설?습니다.

40계단을 내려오며 당시의 애환을 담고 있는 조각 작품을 눈물겹게 감상했습니다. 물지게를 진 소녀, 튀밥 튀기는 노인, 혼자 계단에 앉아 아코디언 켜는 사내를 바라보며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겼습니다. 모두들 제 어린 시절의 추억어린 유물들이어서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날씨는 무척 더웠지만 다시 발걸음을 옮겨 영도다리로 천천히 접어들었습니다. 과거 식민지 시절, 개폐식으로 제작된 다리가 오랫동안 일반 교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예전처럼 개폐식으로 복원시킨다는 소식입니다.

영도다리 입구 오른편,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 우측에는 지금도 1950년대 초반의 우울한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사주, 관상, 작명, 택일을 본다는 낡고 허름한 점집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족들은 난리통에 헤어질 때 무작정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며 외쳤습니다. 하지만 찾아온 영도다리에는 갈매기 울음과 파도소리만 들렸습니다. 그 피란민의 쓸쓸한 마음에 이 점집 주인들은 실낱같은 희망과 용기나마 주었을 것입니다. 돌계단을 내려가며 간판을 보니 금강산철학관, 목화철학관, 소문난 대구점집 등 이름은 여전히 과거의 위세를 자랑하듯 거창한데 찾는 발길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점집 주인으로 보이는 깡마른 장님 노파는 문을 반쯤 열어놓은 채 바닥에 손등을 베고 누워서 깊은 낮잠에 빠져 있습니다. 영도다리의 철판 위에는 누가 쓴 것인지 "너무 보고 싶다"란 글씨가 희미하게 보입니다.

다리를 건너 영도 쪽으로 들어서기 직전 오른 편에 앉아계신 반가운 얼굴을 만납니다. 가수 현인 선생의 동상! 그분은 혼자 바다 쪽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노래활동을 시작한 이른바 '가수 1세대'의 대표적인 대중가수로 본명은 현동주(玄東柱)이지요. 1919년 부산 구포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말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지금의 도쿄예술대학) 성악과를 졸업했습니다. 일제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태양'이란 이름의 악단을 조직해 활동하였고, 1946년 귀국하여 해방된 조국에서 악단을 조직한 뒤 극장 무대에서 연주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작곡가 박시춘과 운명적 만남의 과정을 거쳤고, 마침내 순수음악의 자부심으로 꼿꼿하던 현인은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목젖을 덜덜 떠는 듯한 현인의 독특한 창법과 음색으로 취입한 '신라의 달밤'은 과거의 틀에 박힌 창법에 피로를 느끼던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잇따라 발표한 '비 내리는 고모령'은 식민지 시절의 가족이산과 그 눈물겨운 곡절을 고스란히 되살려준 노래로 크나큰 감명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 노래는 다름 아닌 대구 테마 노래였지요. 현인의 대표곡은 6·25전쟁과 더불어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를 통해 발표된 '굳세어라 금순아' 노랫말에는 흥남부두, 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전쟁 때문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낯선 타향에서 고통받아야 했던 서민들의 슬픔은 이 가요작품에서 모두 절절하게 재생되고 있습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의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 '굳세어라 금순아'란 노래가 부산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가사 내용의 효과에서 비롯된 선입견입니다. 작사가 강사랑은 여순사건에 관련된 인물로 오랜 도피생활 끝에 1950년대 초반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있던 옛 친구 박시춘에게 찾아와 의지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병주 선생이 운영하던 오리엔트레코드사는 대구의 송죽극장 맞은편 건물에 있었는데, 어느 날 점심 때 오리엔트 식구들과 냉면을 먹으러 가던 중 강사랑은 피란민의 초라하고 지친 행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착상을 얻었다고 합니다. 1·4후퇴와 흥남철수의 후유증은 고스란히 대구와 부산으로 밀어닥쳤습니다. 대구의 양키시장과 부산의 국제시장은 생존을 위한 그들의 마지막 공간이었습니다. 완성된 가사에 감흥을 얻은 박시춘은 곧바로 작곡에 들어갔고, 오리엔트레코드사 2층의 다방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 군용담요를 창문에 겹겹이 가리고 참으로 눈물겨운 녹음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가요작품이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입니다.

1950년대 초반의 대구는 이처럼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습니다. 모든 예술가들이 대구와 부산으로 피란 내려와 집결해 있던 시절, 대구란 지역의 의미는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놀라운 내공의 빛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대구의 문화적 위상은 어떠합니까? 그 절박한 굶주림과 고달픔 속에서도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불멸의 가요작품을 만들어내었던 대중문화의 우뚝한 패기와 담력은 이제 어디로 잠적해버린 것인지요? 피란지 대구에서 만들어졌던 이 노래는 이제 민족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동순(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