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4 서민적 삶을 노래에 담은 '천재음악가' 김용환

가포만 2017. 3. 14. 18:45

하늘은 인간에게 많은 재주를 베풀어주었지만 대개 한 가지 부문에만 특별한 솜씨를 주셨지요. 그런데 이 음악판에서 혼자 각양각색의 다양한 재능을 한 몸에 지니고 종횡무진 바람찬 세월을 앞장서 헤쳐 갔던 대중음악인이 있었습니다. 한국가요사 전체를 통틀어 작사와 작곡과 노래를 겸했던 만능 대중음악인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우선 당장 손꼽을 수 있는 인물로는 천재음악가 김해송(金海松) 정도가 있겠지요.

여기에다 한 사람을 더 들라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김용환(金龍煥)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면은 하나같이 뛰어난 독보성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늘 한국가요사에서 매우 귀한 천재음악가였던 김용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뛰어난 가수이자, 작곡가이자 만능 대중음악인으로서의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김용환은 1909년 함남 원산에서 출생했습니다. 기독교 집안이었으므로 예수의 제자 요한의 이름을 따서 용환이 되었습니다. 그의 다른 형제들로는 가수로 출세한 아우 김정구, 피아니스트인 아우 김정현, 소프라노 가수인 누이동생 김안라 등 원산의 출중한 음악가 집안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김용환의 아내 정재덕 또한 원산 출생으로 가수가 되었으므로 가히 명문 음악가 집안이라 할 만하지요.

작곡과 가창은 물론이요, 연극배우로서의 재능을 뽐내기도 했고, 온갖 악기 연주에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노래는 언제나 툭 트인 목소리로 능청스럽고도 시원시원한 창법으로 불렀습니다. 체격은 남성적 풍모에 완강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원래 김용환은 원산지역의 동방예술단(조선연극공장)에서 연극배우로 출발했습니다. 작곡가로서 맨 처음 데뷔한 것은 조선일보의 가사모집에서 신민요 '두만강 뱃사공'이 당선되고부터입니다. 이 경력이 바탕이 되어 1932년 근대식 레코드회사들의 조선 진출에 따라 서울의 포리돌레코드사에서 전속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노래 이름만 들어도 그 시절이 기억되는 '구십리 고개' '노다지 타령' '모던 관상쟁이' '낙화유수 호텔' '이꼴 저꼴' '장모님전 항의' 등의 노래가 바로 김용환이 히트시킨 작품들입니다. 김용환의 노래를 귀 기울여 가만히 듣노라면 마치 판소리를 부르는 가객의 걸쭉한 창법에 서민적 삶의 구수한 향취가 느껴집니다. 뭐랄까, 민중적 넉살이랄까요? 그 넉살도 바탕에 따뜻한 슬픔과 연민이 깔려 있는 여유로움의 과시이지요. 나라의 주권이 이민족에 빼앗겨 유린과 압박을 당하던 시기에서 이러한 창법의 효과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성을 지켜내는 일에 자연스러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김용환의 또 다른 재능으로는 뛰어난 신진 가수를 발굴하는 남다른 재주와 안목을 갖추었다는 점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가수 이화자의 발굴입니다. 1935년 여름, 김용환은 경기도 부평의 어느 술집에 노래 잘 부르는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곧바로 찾아가서 실력을 테스트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부르는 기막힌 '노랫가락'을 듣고 발탁하여 오랫동안 연습을 시킨 다음, 마침내 오케레코드사를 통해 '꼴망태 목동'과 '님전 화풀이'로 큰 성공을 거두게 합니다. 물론 김용환이 김영파란 예명으로 곡을 만들어 이화자에게 주었지요. 1939년은 김용환에게 있어서 최고의 해였습니다. '어머님전 상서'(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이화자 노래)가 발표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님 어머님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나이까/ 복모구구 무임하성지지로소이다

하서를 받자오니 눈물이 앞을 가려/ 연분홍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나이다



어머님 어머님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나이까/ 피눈물로 먹을 갈어 하소연합니다.

전생에 무슨 죄로 어머님 이별하고/ 꽃피는 아침이나 새 우는 저녁에/

가슴 치며 탄식하나요

험한 세월의 칼바람과 거친 눈보라 앞에서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 곁을 떠나 멀리 남양군도로, 중국 땅으로, 혹은 시베리아로 끌려가야만 했던 이 땅의 식민지 청년들은 피눈물로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이른바 조선여자정신대란 이름으로 끌려갔던 처녀들, 지원병이란 이름으로 붙들려간 청년학생들, 징용과 보국대란 이름으로 끌려갔던 한국인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순박하게 살아온 그들이 왜 그런 형벌을 뒤집어써야만 했던 것입니까? 누가 그들의 삶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것인지요?

조명암의 가요시도 절창이지만 김용환의 슬픈 작곡은 이 노래를 듣고 부르는 한국인들의 가슴을 도려내고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을 저절로 쏟게 만들었습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 작곡가로 활동할 때의 김용환은 김영파, 김탄포, 조자룡이란 예명을 함께 번갈아가며 사용했습니다.

김용환이 가수로서의 재주를 듬뿍 뽐내고 있는 작품으로는 '낙화유수 호텔'을 비롯한 '모던 관상쟁이' '술 취한 진서방' '눈깔 먼 노다지' '복덕장사' '장모님전 항의' 등과 같은 만요풍의 노래들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처럼 만요(漫謠)란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러운 분위기의 노래를 말합니다. 하지만 표면에 드러나는 웃음 뒤에는 대개 눈물의 현실, 모순과 부조리의 사회를 고발하고 풍자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지요. '낙화유수 호텔'은 한국의 만요 중에서도 매우 수준 높은 작품에 속합니다.



우리 옆방 음악가 신구잡가 음악가/ 머리는 상고머리 알록달록 주근깨/ 으스름 가스불에 바요링을 맞추어

(대사) 자 창부타령 노랫가락 개성난봉가/ 자 뭐든지 없는 거 빼놓곤 다 있습니다/ 에 또 눈물 콧물 막 쏟아지는 '낙화유수' '세 동무'/ 자 십전입니다 단돈 십전 십전

--만요 '낙화유수 호텔' 1절



밤 깊은 길거리에서 카바이트 불빛을 밝혀놓고 노래책을 팔고 있는 길거리 서적상의 광경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바람 찬 거리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1930년대 후반기 식민지 사회의 전형적 풍경을 이보다 더 실감나게 담아낸 노래나 문학작품은 별로 없었지요.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런 점에서 확인이 됩니다.

이후 김용환은 '가거라 초립동'를 히트시킨 다음, 1949년 4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아까운 나이에 너무도 일찍 서둘러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천재적 대중음악인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