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1 민족의 한과 저항 담아낸 '목포의 눈물' 이난영

가포만 2017. 3. 14. 18:48

숲을 거닐 때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 숲은 얼마나 쓸쓸할까? 인간 세상에서 숲의 새소리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가수가 부르는 절절한 노래가 아닐까 한다. 새소리가 있어서 숲이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가수들의 좋은 노래가 있어서 세상살이의 고달픔은 한결 반감되고 위로를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강탈당하고 갖은 유린을 겪던 시절, 입이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던 때에 이난영이 불렀던 노래 한 곡은 우리 강토를 깊은 슬픔과 격동 속에 잠기도록 하였다.

대체 깊은 슬픔이란 무엇인가? 다만 슬픔의 늪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깊은 슬픔이 아니다. 슬픔을 불러오게 한 근원을 찾아내어 그것을 파헤치고,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올바른 분별과 깨달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힘을 깊은 슬픔은 가졌다.

식민지 시대 가요계엔 슬픔에 잠긴 우리 겨레의 가슴을 쓰다듬고 위로해주던 많은 가수가 있었으나 이난영만큼 생기롭고도 발랄하며 상큼하면서도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해준 가수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이난영으로 하여금 깊은 슬픔의 성음을 자아낼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거의 모진 핍박에 가까운 고난과 역경이 바로 그 힘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그 어떤 신산한 지경에 허덕일지라도 이난영은 결코 무릎을 꿇거나 비굴하지 않는 자세로 그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지혜와 자세가 아닌가 한다.

1916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이난영은 어릴 때 이름이 옥례였다. 항상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 지독한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떠난 이후로 줄곧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물풀처럼 살아간다. 삼촌댁에서 더부살이 아이로, 혹은 제주도의 일본인 가정에 들어가서 아이보개로, 혹은 떠돌이 유랑극단의 식모살이와 무명의 막간가수로…. 이것이 소녀 이옥례가 겪었던 눈물의 시간이었다. 30년대 초반 태양극장의 이름 없는 막간가수로 일본공연에 참가하게 된다. 이 무렵 태양극장 단장이던 박승희가 옥례의 예명을 이난영이라 지어주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활동도 고달픈 역경의 한 과정일 뿐이었다. 밥도 굶고 생활비도 떨어져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을 때 이난영은 마침내 오케레코드라는 멋진 활동무대와 만나게 된다. 이철 사장과의 운명적 만남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난영의 나이 17세 되던 1933년은 그녀의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던 화려한 무대의 시간이었다. '지나간 옛꿈'(김파영 작사, 김기방 작곡, 태평 8068), '향수'(김능인 작사, 염석정 작곡, 오케 1580)를 단번에 히트시키면서 잇따라 '고적' '불사조' 등을 발표하였다. 전 조선의 가요팬들은 애교를 머금은 이난영의 독특한 코맹맹이 소리에 흠뻑 빠져들었다.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 전혀 녹을 기색조차 없던 슬픔과 한이 이난영의 노래를 듣는 순간 스르르 녹아내려 눈시울을 흥건히 적시곤 했던 것이다. 이난영의 두 번째 히트곡으로는 '봄맞이'(윤석중 작사, 문호월 작곡, 오케 1618)를 손꼽을 수 있다. 모진 겨울에서 슬금슬금 풀려나는 이른 봄, 이 노래의 구성진 가락을 듣노라면 가슴 속 차디찬 빙하가 녹아내리는 기적을 경험하곤 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느니 오직 이난영의 노래요, 그 창법과 음색의 흉내였다.

이난영의 노래에 가사를 많이 제공했던 작사가로는 조명암, 박영호, 이규희, 남풍월, 김능인, 윤석중, 차몽암, 박팔양, 신불출, 양우정, 강해인 등이었다. 주로 시인들이 많은 작품을 주었다. 작곡가로는 문호월, 염석정, 홍난파, 이면상, 손목인, 박시춘, 김해송, 이봉룡 등 당대 최고의 대가급이었다. 이난영 노래의 특색이라면 밝고 생기로운 느낌이 드는 청년기 세대들의 삶에서 테마를 선택한 작품이 많았고, 이난영이 이를 잘 소화시켰다. 그 때문에 경쾌하고 깜찍하며 발랄한 정서가 듬뿍 느껴지는 작품이 많았다. 김해송과 함께 만든 작품 중에는 재즈 스타일의 노래도 많았다. 더불어 이난영의 노래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신민요풍의 곡이다. '오대강 타령' '이어도' '녹슬은 거문고'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작사가 김능인과 작곡가 문호월 콤비에다 이난영의 창법이 조화를 이루면 더할 나위없는 멋진 트리오를 이루었던 것이다.

드디어 이난영의 생애에서 최고의 해가 찾아왔다. 1935년, 그녀의 나이 19세 되던 해에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이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되었다. 이 음반은 무려 5만장이나 팔려나가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노래 한 곡으로 이난영은 단번에 가요계의 여왕 자리에 올랐다. 한 곡의 유행가는 식민지 땅을 온통 흐느낌으로 잠기게 하였고, 항구도시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장소로 되살아나게 하였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마치 꽁꽁 앓는 듯한 이난영 특유의 콧소리에다 흐느끼는 듯 잔잔하게 애간장을 토막토막 끊어내는 느낌의 창법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노래였다. 모두들 입을 모아 이난영의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의 오묘한 효과가 그대로 배어난다며 무릎을 쳤다. 가슴에 깊은 슬픔이 자리잡고 떠나지 않는 독자들이 계시다면 이 노래를 혼자 나직이 흥얼거려 보시라. 그런 다음에 어떤 반응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가만히 지켜보시기를 권하는 바이다. 사실 이 노래는 가사에도 반영되어 있듯 일제에 대한 한과 저항의 혼이 표현된 민족의 노래였다. 인기가수가 되었지만 이난영에게 시련과 역경은 끝이 아니었다. 작곡가 겸 가수로 이난영과 급격히 가까워진 김해송은 기어이 혼인을 했고, KPK란 이름의 악극단 경영까지 했다. 하지만 6·25전쟁의 세찬 풍파는 이 부부를 영원한 이별로 갈라놓았다. 일곱 자녀에게 매로 노래를 가르쳐 김보이즈와 김시스터즈로 미국에 진출시켰지만 이난영은 늘 혼자였다. 결핵에 걸려 임종을 앞둔 가수 남인수와 마지막 불나비 같은 사랑을 불태우다가 1965년, 결국 49세의 나이로 혼자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경기도 파주의 어느 산중턱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묻혀 있던 이난영은 드디어 2006년 목포 삼학도 자락, 그녀의 고향 언덕으로 되돌아왔다. 목포시가 주선한 수목장 덕분이었다.

구름처럼 고향을 떠난 지 몇 해만인가. 이제 이난영의 영혼은 유달산 자락의 정겨운 바람결로 항시 자리잡고 있으리라. 그 바람결은 지금도 '목포의 눈물'을 도란도란 부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