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9 식민지 백성의 설움 노래한 가수, 고복수 영남일보 2007-06-28

가포만 2017. 3. 25. 18:51

기어이 전집물을 들고 서울 시내 다방을 떠돌며 "저 왕년에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입니다"라면서 눈물 섞인 목소리로 서적외판원이 되었던 슬픈 장면을 되새겨 봅니다. 그는 자신의 은퇴공연 무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수 생활 26년 만에 얻은 것은 눈물이요, 받은 것은 설움이외다."

때로 한 편의 시작품보다 유행가 가사가 더욱 절실한 느낌으로 가슴속에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좀 더 나은 삶을 향해 오늘도 안간힘을 쓰며 땀 흘리는 인간의 삶은 온갖 힘겨운 부담과 피로가 덧쌓여서 한날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의 지난 시절은 험난했습니다. 봉건 왕조의 우울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시점에서 우리 겨레는 제국주의 침탈이라는 새로운 질곡에 신음해야만 했습니다. 그 제국주의는 고무신과 안경, 혹은 석유와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명종의 얼굴로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유혹이자 바닥 모를 늪이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슬금슬금 불안의 밑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우리는 삶의 중심과 갈피를 모조리 잃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기도 전에 가혹한 수탈과 모진 유린이 시작되었지요. 자고 나면 밝은 아침이 와야 마땅한데 광명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고, 눈앞엔 여전히 고달픈 암흑천지였습니다.

고복수가 처연한 성음으로 불렀던 '타향살이'와 '사막의 한'은 바로 이러한 세월의 암담함을 상징적으로 빗대어 표현한 노래였습니다. 두 곡 모두 뛰어난 작사가 김능인 선생과 작곡가 손목인 선생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지요.

가수 고복수는 1912년 경남 울산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친은 잡화상을 경영하는 영세한 상인이었습니다. 유달리 음악을 좋아했던 고복수는 교회 합창단에 들어가 각종 악기를 익혔고, 뒷동산에 올라가 해가 저물도록 노래를 불렀습니다. 1930년대 중반 고복수는 경남 울산에서 전국가요콩쿠르 예선에 뽑히긴 했지만 서울로 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가수로서 출세를 꿈꾸던 청년 고복수에겐 이것저것 물불을 가릴 틈이 없었지요. 마침내 아버지가 잠들었을 때 금고에서 60원을 몰래 꺼내어 달아났고, 33년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서울 본선에서 기어이 1등으로 뽑혔습니다. 이때 고복수는 22세였습니다.

1934년 오케레코드사로 옮겨간 고복수는 자신의 최고 출세작이자 우리 민족의 노래라 할 수 있는 '타향살이'로 엄청난 히트를 했고, 잇따라 '사막의 한'이 또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사막의 한'은 경쾌한 템포의 노래이지만 '타향'처럼 망국의 설움을 사막에서 방황하는 나그네에 실어서 표현했습니다. '타향살이'의 원제목은 '타향'이었는데, 이 음반의 또 다른 면에 수록된 노래는 '이원애곡'이었습니다. 떠돌이 유랑극단 배우의 신세를 슬프게 노래한 내용이었지요. 이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은 발매 1개월 만에 무려 5만장이나 팔렸고 단번에 만인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나날이 인기가 쇄도하자 레코드사에서는 제목을 '타향살이'로 바꾸고 위치도 B면에서 A면으로 옮겨 다시 찍었습니다. 쓸쓸한 애조를 머금은 소박한 목소리, 기교를 섞지 않는 창법이 고복수 성음의 특징이었습니다. '타향살이'는 한국가요의 본격적 황금기를 개막시킨 첫 번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북간도 용정 공연에서는 가수와 청중이 함께 이 노래를 부르다 기어이 통곡으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손목인의 곡으로 대표가수가 된 고복수는 작곡가 손목인에게 평생 '선생님'으로 호칭하며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이철 사장은 무려 2천원이란 거금을 전속축하 격려금으로 지급했습니다. 당시 소학교 교사의 월급이 42원이었으니 참 대단한 액수라 하겠습니다. 고복수는 이 돈을 들고 고향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무릎 앞에 엎드려 울면서 죄를 빌었습니다. 고복수의 부친은 돈을 훔쳐 달아난 아들에게 괘씸한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지만, 가수로 크게 성공해서 돌아온 아들이 속으로 너무나 흐뭇했습니다. 광대가 되려면 부자간의 인연을 끊어버리자고 노여움을 표시했던 부친은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송아지를 잡아서 동네잔치를 열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흥겨웠던 모꼬지였을까요?

고복수의 대표곡들로는 '휘파람' '그리운 옛날' '불망곡' '꿈길천리' '짝사랑' '풍년송' '고향은 눈물이냐' 등입니다. 거의 대부분 잃어버린 민족의 근원을 다룬 내용들입니다.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도 원래는 '갈매기 항구'란 노래로 고복수 취입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난영에게 양보를 해서 만들어진 가요곡입니다. '짝사랑'에 등장하는 노랫말 '으악새'는 억새라는 식물인지 왁새라는 이름의 조류인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가수 고복수의 삶은 비교적 순탄했지만 불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에 납치되어 끌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던 일, 악극단 경영과 운수회사의 잇단 실패는 늙은 가수의 몸과 마음을 극도로 지치게 했습니다.

기어이 전집물을 들고 서울 시내 다방을 떠돌며 "저 왕년에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입니다"라면서 눈물 섞인 목소리로 서적외판원이 되었던 슬픈 장면을 되새겨 봅니다. 그는 자신의 은퇴공연 무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수 생활 26년 만에 얻은 것은 눈물이요, 받은 것은 설움이외다." 당시 우리의 문화적 토양과 환경은 이처럼 훌륭했던 민족가수 한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고 지켜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국가요사에서 이젠 불후의 명곡이 된 '타향살이'의 애잔한 곡조를 흥얼거려 봅니다. 1927년까지 만주로 쫓겨간 이 땅의 농민들은 무려 100만명이 넘었습니다. 관서·관북지역의 험준한 산악에서 화전민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120만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런 역사적 사연과 아픔을 생각하면서 '타향살이'를 일부러 잔잔히 불러보면 어떨까 합니다. 더불어 옛 노래는 가사를 음미하면서 읊조리듯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동순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