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0 가요 황제'로 불린 가수 남인수 영남일보 2007년

가포만 2017. 3. 14. 18:49

우는 소리가 마치 피를 토하듯 처절한 느낌으로 들린다고 해서 자규(子規)란 이름으로 불리던 새가 있었지요. 자규란 두견새, 접동새란 이름으로도 불리던 소쩍새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옛 선비들은 멸망한 왕조의 슬픔을 이렇게 새 울음소리에 견주어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의 근대 가수들 가운데서 두견새의 흐느낌처럼 거의 절규와 통곡에 가까운 음색으로 노래를 부른 가수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험난했던 시기인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온몸으로 역사의 눈보라를 고스란히 맞으며 그 고난의 시기를 피눈물로 절규한 가수 남인수(南仁樹)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산유화'란 노래의 한 소절을 기억하시는지요?

산에 산에 꽃이 피네 들에 들에 꽃이 피네/ 봄이 오면 새가 울면 님이 잠든 무덤가에/ 너는 다시 피련마는 님은 어이 못 오시는가/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산유화' 1절)

이 노래의 창법은 거의 통곡과 절규처럼 들립니다. 김소월의 시작품 '산유화'를 연상케 하는 이 가요작품은 어떤 우여곡절로 인하여 주어진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비명에 세상을 떠난 모든 생령을 흐느낌으로 위로하고 애틋했던 존재를 더듬는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근대사에는 그러한 중음신(中陰身)들이 참으로 많겠지요. 언제였던가? 다정한 벗과 더불어 어느 해 늦가을 지리산 세석평전에 올라 어둑한 저녁에 텐트를 쳐놓고 앉아서 반합 뚜껑에 소주를 부어 서로 권하며 이 노래를 밤새도록 함께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험난했던 역사의 언저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념의 포로가 되어 지리산 골짜기로 내몰렸던 가엾은 청년들의 짧았던 생애를 더듬으며 그날 밤 우리는 이 노래를 절규로 불러서 그들에게 헌정했던 것입니다.

가수 남인수는 40여년 가까운 생애를 통하여 무려 1천곡가량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많고 많은 노래 중에서 공연 중 앙코르를 요청받을 때 반드시 이 '산유화'로 팬들에게 보답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노래는 남인수 자신이 정작 가장 사랑했던 작품이었던가 봅니다. 낡은 유성기 음반으로 들어보는 '산유화'는 그것이 단지 한 편의 대중가요가 아니라 매우 격조 높은 성악곡을 듣는 듯 놀라운 예술성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한국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팬들에 의해 '가요황제'로 불렸던

가수 남인수는 191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했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서

진주강씨 문중으로 들어가 호적 명이 강문수(姜文秀)로 바뀐 것이지요.

그러다가 가수로 데뷔한 뒤에 작사가 강사랑에 의해

남인수란 예명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보더라도 경남 진주는 가수 남인수의 제2의 고향이자 성장지였습니다. 이 지역은 이미 작곡가 손목인, 이재호, 이봉조 등을 비롯하여 예능 방면에서 활동하는 많은 명인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합니다.

남인수, 즉 강문수가 본격가수로 데뷔하게 된 것은 시에론레코드사 사무실에서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이던 문예부장 박영호와의 운명적 만남 직후였습니다.

1936년, 18세의 나이로 남인수는 '눈물의 해협'(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을 최초로 취입하게 됩니다.

현해탄 초록 물에 밤이 나리면/ 님 잃고 고향 잃고 헤매는 배야/ 서글픈 파도 소래 꿈을 깨우는/ 외로운 수평선에 짙어 가는 밤. ('눈물의 해협' 1절)

비극적 한·일관계와 한반도의 슬픔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노래였으나 대중의 반향은 그리 시원치 않았습니다. 시에론을 떠나 오케레코드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눈물의 해협'에서 가사만 바꾼 '애수의 소야곡'(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을 발표했습니다. 박시춘이 직접 기타를 치고, 나비넥타이를 맨 남인수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당시 대중의 가슴을 크게 격동시켰습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애수의 소야곡' 1절)

'애수의 소야곡'은 발표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남인수는 곧장 최고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른바 공전의 대히트였지요.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음반 판매점에서는 가게 앞에 유성기를 내다 놓고 달콤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불러 넘기는 남인수의 그 노래를 날마다 연속으로 틀고 또 틀었습니다. 매진된 레코드를 구하기 위해 레코드 회사 앞 여관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레코드 상인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당시 언론들은 남인수의 목소리를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성의 가수 탄생'을 연일 보도하며 남인수의 출현에 대한 감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음반을 주문하려는 전국의 레코드 소매상들이 서울로 구름같이 몰려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이후로 발표한 남인수의 대표곡이 얼마나 많은지 그 정황을 알고 나면 아마 여러분께서는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서귀포 칠십리'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거라 삼팔선' '고향은 내 사랑' '고향의 그림자' '기다리겠어요' '꼬집힌 풋사랑' '낙화유수' '남매' '남아일생' '눈오는 네온가'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무너진 사랑탑' '무정열차' '물방아 사랑' '어린 결심' '어머님 안심하소서' '울리는 경부선' '인생선' '청년고향' '청노새 탄식' '청춘고백' '추억의 소야곡' 등.

우선 사례를 떠올려 보더라도 이렇게 스무 곡을 당장에 넘길 만큼 주옥같은 노래들이 있지요. 하나같이 아름다운 절창으로 여러분의 흘러간 시절, 가슴 속에 한과 눈물과 사연도 많았던 그 시절의 추억들이 마치 흑백사진의 실루엣처럼 어렴풋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가수 남인수의 노래가 우리 가슴에 가장 절절하게 사무치도록 다가오는 시간은 우리네 삶이 어딘가에 시달려 심신이 몹시 피로하거나 곤비한 시간입니다. 아니면 고달픈 나그네 길에서 돌아오는 경우라도 잘 어울립니다. 이러한 저녁 시간, 버스나 기차의 붐비는 공간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바로 그때 성능이 시원치 않은 스피커에서 뿌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뒤섞여 들려오는 정겹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자세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것은 틀림없이 남인수의 노래이지요.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남인수의 노래는 대개 유랑과 향수,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과거의 회상, 인생의 애달픔 따위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