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8 막간가수, 이애리수 영남일보 2007-06-14

가포만 2017. 3. 25. 18:52

자신의 몸속에 갈무리된 이른바 '끼'라는 것은 아무리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제압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지요. 줄곧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배우나 가수들이야말로 이 타고난 끼를 마음껏 발산하고 그 재주를 뽐내어야 비로소 대중적 스타로서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는 타고난 끼에 자신의 모든 운명이 휘둘려서 생의 한 구간을 살아갔던 인물입니다.

이름도 특이한 이애리수는 1930년 '황성(荒城)의 적(跡)'('황성 옛터'의 원래 이름) 한 곡으로 우리 문화사에서 그 살뜰한 이름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고운 사람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한 경과를 보면 한 사람의 가수로서 많은 곡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민족의 심금을 울려주는 단 한 편의 절창을 남길 수 있는가의 문제는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애리수는 1910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습니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자세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렸을 때의 이름이 보전(普全)으로 예능의 끼가 펄펄 넘치는 아이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완고한 집안 어른들에게 그리 달가운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순회연극사 소속의 이애리수는 여러 단원과 함께 관서지방 일대를 돌며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 악극단이 마침내 경기도 개성 공연을 마치던 날, 극단의 중요 멤버인 왕평과 전수린 두 사람은 멸망한 고려의 옛 도읍지 송도의 만월대를 산책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휘영청 보름달이 뜬 가을밤이었는데, 더부룩한 잡초더미와 폐허가 된 궁궐의 잔해는 망국의 비애와 떠돌이 악극단원으로서의 서글픔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비감한 심정에 젖은 두 사람은 눈물에 젖어 돌아와 그날 떠오른 악상을 곧바로 오선지에 옮겼고,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그해 늦가을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의 막을 올릴 때 이 노래를 배우 신일선에게 연습시켜 막간에 부르도록 했습니다. 신일선은 나운규가 만든 무성영화 '아리랑'에서 주인공 영희 역을 맡았던 어여쁜 배우였습니다. 이 곡을 듣는 관객들의 볼에는 저절로 눈물이 주르르 타고 내렸습니다. 여기저기서 탄식의 깊은 한숨까지 들렸습니다. 모든 청중의 가슴에는 망국의 서러움과 가슴 저 밑바닥에서 비분강개한 심정이 끓어올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무대에서는 주로 이애리수가 이 곡을 불렀고, 1932년 봄 마침내 빅터레코드사에서 정식으로 음반을 취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버레 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덧없난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난 이 심사를 가삼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넷터야 잘 있거라.



전국의 가요팬들은 이 '황성의 적'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레코드판매점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축음기 판매량도 늘어났습니다. 주로 악극단 공연이나 무대를 통해서만 보급되던 유행창가나 영화주제가들이 드디어 음반을 통해 정식으로 보급되는 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 음반이 나오자마자 불과 1개월 사이에 5만장이나 팔려나갔다고 하니 그 인기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워낙 인기가 높아가자 일본 경찰 당국에서는 바짝 긴장의 털을 곤두세웠습니다. 혹시라도 이 노래의 가사 속에 민족주의 사상이나 불온한 내용이 없는지 뒤지고 두리번거렸지요. 극장에서도 반드시 임석 순사가 입회하여 흥분한 관중들 앞에서 가수가 이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금지했고, 나중에는 기어이 트집을 잡아서 발매금지를 시키고 말았지요. 이 노래를 만든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경찰서에 불려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이애리수의 인기는 193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왕수복과 선우일선을 비롯한 기생가수의 출현, 이난영·전옥 등 새로운 창법과 감각을 지닌 후배가수들에게 가요팬들의 시선이 쏠리게 된 것이지요. 창가풍의 단조로운 음색에 익숙한 이애리수의 노래는 인기 반열에서 차츰 퇴조하게 됩니다. 묵은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간의 질서를 구축하는 변화의 물결은 그 자체가 너무나 비정하고 막을 수 없는 것일 테지요. 한 잡지사가 조사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결선에서도 이애리수의 노래는 앞 순위에 오르지 못하고 점점 그녀의 이름은 관심권에서 멀어져갔습니다.

이러한 때 이애리수는 그녀의 노래를 몹시 사랑하던 한 대학생과 우연히 만난 이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연희전문 졸업반 학생이던 배동필! 하지만 이미 배동필에게는 부모가 맺어준 아내가 있었던 것이지요. 대학생과 가수라는 현격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행한 난관이 수렁처럼 앞을 가로막습니다.

만날 기회조차 잃어버린 그들은 이승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깊은 밤 몰래 만나 극약을 함께 나누어 마시고 정사를 시도합니다. 겨우 구출되어 기력을 회복한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아낸 듯한 노래 '버리지 말아 주세요'(이고범 작사, 전수린 작곡)를 마지막 곡으로 취입하게 됩니다. 그 애처로운 음색은 듣는 이의 가슴을 서러움으로 빠뜨렸고, 눈물까지 뚝뚝 흘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완고하던 배동필 부모는 이 노래를 듣고서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을 승낙하게 됩니다.

가을밤만 되면 처량한 귀뚜라미 소리를 효과음으로 해서 이따금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귀에 익은 가수의 슬프고 애잔한 노래가 있습니다. 이애리수의 노래 '황성의 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줄곧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노래 한 곡이 지닌 위력은 그토록 완강하던 식민지의 어둠을 조금씩 깨어 부수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