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7 슬픈 유랑의 사연을 들려준 가수 강석연 영남일보 2007-05-31

가포만 2017. 3. 25. 18:53

강석연의 '방랑가'를 다시금 귀 기울여 들어보면 넋을 놓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아득한 눈보라 벌판을 걸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가파른 세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반성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무대책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경고와 메시지를 작품의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지요.


피가 뜨거워야 할 젊은이의 몸에서 피는 식었습니다. 그리고 두 눈에는 흥건한 눈물이 괴어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젊은이의 마음은 낙망과 설움으로 가득 차 있고, 온몸에는 병도 깊었군요. 이런 몸으로 과연 어디를 어떻게 여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가수 강석연이 불렀던 노래 '방랑가'의 한 대목은 차디찬 북국 눈보라 퍼붓는 광막한 벌판을 혼자 의지가지없이 떠나갑니다. 이 노래 가사에 담겨 있는 내용은 그야말로 비극적 세계관의 절정입니다. 그 어떤 곳에서도 희망의 싹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실제로 1920년대 초반 당시 우리 민족의 마음속 풍경은 이 '방랑가'의 극단적 측면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좌절과 낙담 속에서 우리는 기어이 1919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펼쳤고, 죽음을 무릅쓴 채 불렀던 만세소리는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우리의 주권회복 운동은 잔인무도한 일본군경의 총칼에 진압이 되고 말았지요. 그 후의 처절 참담한 심경은 말로 형언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1920년대의 시작품도 몽롱함, 까닭모를 슬픔, 허무와 퇴폐성 따위의 국적을 알 수 없는 부정적 기류가 들어와 대부분의 식민지 지식인들은 그 독한 마약과도 같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31년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잘 담아낸 노래 한 편이 발표되어 식민지 청년들의 울분과 애환을 대변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랑가'였습니다. 한 잔 술에 취하여 이 노래를 부르면 그나마 답답하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듯했습니다. 줄곧 명치끝을 조여오던 해묵은 체증 같은 것이 다소나마 씻겨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피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움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내 가슴 뉘가 알거나

돋는 달 지는 해 바라보면서/ 산 곱고 물 맑은 고향 그리며/ 외로운 나그네 홀로 눈물 지을 새/ 방랑의 하루해도 저물어가네

춘풍추우 덧없이 가는 세월/ 그동안 나의 마음 늙어 가고요/ 가약 굳은 내 사랑도 시들었으니/ 몸도 늙어 맘도 늙어 절로 시드네'


강석연은 1914년 제주도에서 출생했지만, 일찍부터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자랐습니다. 언니 강석제는 토월회에서 활동하는 배우였고, 이 언니의 영향을 받아 무대 활동을 펼쳤습니다. 예능 방면으로 천부적 재능이 있어서 연극, 라디오 드라마 출연, 노래 등으로 이름이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당시 서울에 진출해 있던 일본 콜럼비아레코드사 서울지점에서 노래 잘 부르는 강석연을 뽑아 전속으로 편입했습니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가수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던 시절이었지요. 기생, 영화배우, 연극배우 등이 가장 만만한 가수 발탁의 대상이었습니다.

소설가이자 유명작사가였던 박노홍의 증언에 의하면 강석연의 외모는 '다소 통통하게 생겼으며 모든 행동에 야무진 구석이 많았고, 노래 부르는 모습과 창법도 야무졌다'고 말합니다. 드디어 31년 2월 강석연은 '방랑가'와 '오동나무' 등 두 곡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강석연의 위상을 가수로 심어주는 일에 크나큰 기여를 했지요.

흔히들 '방랑가'를 평가하면서 이 노래가 식민지 시대에 많이도 발표되었던 유성기 음반 중 이른바 '방랑물(放浪物)' 가요의 기점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대중의 반응이 워낙 드높아 여러 레코드회사에서는 여타 인기곡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노래를 이애리수를 비롯한 다른 가수의 버전으로 취입하여 발매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독 강석연이 부른 노래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우뚝한 창법으로 시대적 분위기와 색깔을 잘 담아 들려줍니다. 강석연의 '방랑가'를 다시금 귀 기울여 들어보면 넋을 놓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아득한 눈보라 벌판을 걸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가파른 세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반성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무대책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경고와 메시지를 작품의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지요.

옛 노래는 결코 표면에 나타난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 주변에 서려있는 울림과 반향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제대로 된 맛을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이 노래와 같은 음반의 앞뒷면에 수록된 신민요 '오동나무'는 또 어떠합니까?

당시에도 검열의 매서운 눈초리는 삼엄했을 터이지만 이 노래의 효과는 전반적으로 눈물, 이별, 설움, 원한 따위에 대하여 그 원인을 따져서 묻고 비통한 현실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5절 가사에서 '금수강산은 다 어데 가고요/ 황막한 황야가 웬일인가'란 대목을 읽으며 우리의 억장은 무너지는 듯합니다. 그 아름답고 평화롭던 금수강산의 현실이 이제는 황막한 황야로 변모해버린 정황에 대하여 개탄을 표시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노래 가사가 아니라 거의 민족의 가슴을 세차게 후려치는 웅변적 효과와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 담긴 대목을 가수 강석연은 처연하게도 불러냅니다. 후렴구에서의 여운은 이런 비통한 심정을 한층 고조시킵니다.

유성기 음반 자료는 식민지 시대 주민들의 내면풍경을 고스란히 알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많은 음반 자료들이 여전히 먼지를 덮어쓴 채 우리 앞에 그 전체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동안 험한 세월의 파도가 휘몰아쳐 가는 과정에서 많은 음반이 파괴되어 사라졌을 터이지요. 하지만 남아있는 음반이라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수집하며 갈무리하는 자세가 갖추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