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라면 지금부터 어언 한 세기 전의 세월이다. 나라의 주권은 이민족에게 강탈당하여 주인인 우리가 셋방살이 신세로 상처와 서러움을 겪던 시절이다. 당시 특별한 풍요를 누리며 살던 사람들은 대개 일제와 타협해서 기회주의자로 살아가던 부류였고, 절대다수의 서민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착취와 억압체제 속에서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던 시절이다.
1939년 3월, 빅타레코드사에서는 매우 특이한 음반 하나를 발표했다.
그것은 이규남(李圭南, 본명 임헌익)의 노래 ‘골목의 오전 일곱 시’다.
두부사려 두부요 에헤헤 두부요/ 두부 없는 찌개가 무슨 맛 있나/ 조려 먹고 부쳐 먹는 두부로구려 (두부 사려 두부요)/ 두 모밖에 안 남았소 부엌 마나님/ 에헤혜야 두부요 두부사려
새우젓이요 새우젓 에헤헤 새우젓/ 깍두기를 담을 때 생각나는 것/ 시아버님 진지 상에 빼놓지 마소 (새우젓 사려 새우젓이요)/ 짭짤하게 잘 저렸소 젓국도 있소
콩나물 콩나물 에헤헤 콩나물 죽을 쑤어 먹으면 콩나물죽/ 국 끓이고 무쳐먹는 콩나물이야 (콩나물 사려 콩나물이야)/ 시집보낸 색시처럼 잘도 자랐소/ 에헤혜야 콩나물 콩나물 사려
-이규남 ‘골목의 오전 일곱 시’ 전문
노래가사의 전개과정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두부, 콩나물, 새우젓… 이 서민적 식재료를 서울장안 곳곳으로 팔러 다니던 행상(行商)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각 소절의 중간, 괄호 안에 담겨있는 부분은 바로 이 식재료 행상이 들려주는 목소리다. 한적한 뒷골목의 느낌이 떠오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초로(初老)에 다다른 그 행상의 고단하고 처연한 음색도 느껴진다. 어디 가서 1930년대 골목에서 들려오던 행상의 구수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랴. 이런 점에서 음반은 소멸된 시간을 생생하게 재생시켜주는 매우 중요한 근대문화유산이다.
이 노래의 가창과 세리프를 맡았던 가수 이규남은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성악을 전공했고 서양음악을 통해 예술가적 소양을 쌓았다. 워낙 성음이 부드럽고 서민적 매력을 지녔기에 일본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요청을 받아 대중가수로 음반을 취입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서울로 돌아와 ‘골목의 오전 일곱시’를 비롯해서 ‘눅거리 음식점’, ‘장모님전 상서’, ‘이웃집 딸네’, ‘사랑시대’, ‘안달이로다’ 등의 익살스럽고도 서민적 향취가 물씬 풍겨나는 여러 곡의 만요(漫謠)를 취입했다. 서양음악을 전공했던 음악인이 밑바닥으로 내려와 삶이 고단했던 서민들을 위로하는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눅거리 음식점’의 가사에서도 이러한 것을 물씬 느낀다. ‘눅거리’란 말은 값이 저렴하고 헐한 음식만을 팔고 있는 식당거리를 말한다. 서민들로 가득한 그 식당거리에서는 장국밥, 설렁탕, 육개장국, 비빔밥, 빈대떡, 개피떡, 수수판떡, 인절미, 녹두죽, 보리죽, 콩나물죽, 시래기죽 따위의 정겨운 음식들을 주로 만들어 판다. 노래가사에서 ‘수염이 석자라도’, ‘하늘이 무너져도’ 먹어야 산다는 부분은 대단한 강조다. 그러한 강조에는 식민지의 수탈과 압제 속에서도 버티어 나가려면 일단 먹어야 한다는 불변의 진리가 서려 있다.
가수 이규남은 한국전쟁의 격동 속에서 공산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고, 그 뒤로 남한에서는 완전히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다. 해마다 경남 진주에서 열리는 유등축제 때에는 남강에 오색 등불을 띄우고 환호하는데, 이 무렵 어딘 가에서 반드시 들려오는 은은한 곡조가 있다. 그것이 바로 명곡 ‘진주라 천리 길’이다.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가”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이규남이다.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어렵던 시절, 이규남은 학비를 벌기 위해 진주의 시장거리에서 행상으로 레코드를 팔러 다녔다고 한다. 이 광경을 작곡가 이면상이 보았고, 애달픈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작사가 조명암이 바로 노랫말을 써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진주 남강 둑에 이규남의 노래 ‘진주라 천리길’ 노래비가
세워질 날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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