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서울 기생집 9곳이 나오는 노래를 아시나요? 백세시대 2013년 06월 07일 (금) 이동순 교수 관련 글

가포만 2016. 12. 7. 13:13

아래는 위키백과에 소개 되어 있는 이동순 교수 관련 글인데

지금은 영남대학교를 정년 퇴직,영남대 국문과 명예교수, 시인,문학평론가,

현재는 한국대중음악힐링 대표로서 강연을 다니시고 있다


이동순(1950년 6월 28일 ~ )은 대한민국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국문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왕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198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었다. 충북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를 지냈고, 2012년 현재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지금 그리운 사람은, 철조망 조국,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봄의 설법, 꿈에 오신 그대, 가시연꽃, 기차는 달린다, 아름다운 순간, 미스 사이공, 마음의 사막, 발견의 기쁨, 묵호 등 14권을 발간하였다. 2003년 민족서사시 홍범도(전5부작10권)을 발간하였다. 시선집 맨드라미의 하늘, 그대가 별이라면,

숲의 정신 등을 발간하였다.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한국인의 세대별 문학의식. 시정신을 찾아서,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우리 시의 얼굴찾기, 달고 맛있는 비평 등을 발간하였다. 에세이 시가 있는 미국기행. 실크로드에서의 600시간, 번지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마음의 자유천지-가수 방운아와 한국가요사 등을 발간하였다.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의 시전집을 발간하고, 문학사에 시인을 복원시켰다. 이후 권환, 조명암, 이찬, 조벽암, 박세영 등의 시전집을 잇따라 발간함으로써 분단으로 잊혀진 매몰시인을 집중적으로 발굴했다.


대구MBC 라디오에서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2003년2008년) 프로의 MC로 활동했으며, 미국 워싱턴 소재 자유아시아방송(RFA)의 “남북이 같이 듣는 노래”프로에 매주 고정 출연하고 있다.

수상[편집]

1986년 제5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다. 2001년 제1회 김삿갓문학상, 제15회 금복문화예술상을 받았다. 2003년 제8회 시와시학상, 2004년 제44회 경북문화상, 2010년 제22회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았다.

김남조 시인은 정지용문학상 심사평에서“시의 현장감이 좋았고 거기에 투사된 시인의 모습과 자의식의 독백 같은 것이 모두 적절히 표현됐다”라고 평가했다.


  • 《개밥풀》(1980년, 창작과 비평사) - 첫 시집
  • 《물의 노래》(1983년, 실천문학사) -두 번째 시집
  • 《지금 그리운 사람은》(1986년, 창작사) - 세 번째 시집, 《봄의 설법》(1995년, 창비), 《맨드라미의 하늘》(1988년, 문학사상사), 《꿈에 오신 그대》, 《철조망 조국》(1991년, 창비),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가시연꽃》(1999년, 창비)


  • 《백석시전집》(1987년, 창비)
  • 《조명암 시전집》(1993년 선출판사)
  • 《민족시의 정신사》(1996년, 창비)
  • 《번지 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가요에세이
  • 《깜박 잊어버린 그 이름》(1998년, 솔) - 시인 권환 시집



시인 김지하와 가요 부르기 ‘맞짱’…8시간 동안 불러재껴 완승
어릴 적 여가수 노래 들으면 마음 편해지고, 가사 술술 외워져
반야월 등 옛 가수, 작곡·작사가들의 불후의 명곡 CD 작업도


오래전 이야기지만 그 내용이나 등장인물이 예사롭지가 않다. 1985년 여름의 일이다. 이동순(63) 당시 충북대 교수(현 영남대 교수)는 시인 김지하와 마주 앉았다. ‘가요지존’을 가리는 자리였다. 김지하는 당시 긴급조치9호로 형무소를 들락날락하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작가 김성동 등 ‘김지하 사단’을 거느리고 전국을 방랑하던 때였다. 문단에서 이 교수가 노래를 많이 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김지하가 먼저 도전장을 던졌다. 김지하는 남이 1등 하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이다. 장소는 당시 충북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전채린의 집 거실. 전채린 교수는 자살한 작가 전혜린의 동생으로 영화감독 고 하길종의 부인이다. ‘맞짱 뜨기’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밤 10시부터 시작됐다.


“나이 어린 제가 먼저 부르기 시작했어요. 술도 주고받고 분위기가 좋았어요. 김지하 씨는 노래 부르는 스타일도 시처럼 사람을 푹 빠지게 하고 초긴장을 느끼게도 합니다. 곡마다 몸을 비틀면서 혼신을 다해 불러 노래를 마치면 땀에 흠뻑 젖기도 했어요. 그에 비해 저는 시종일관 낮은 목소리로 낭랑하게 불렀지요.”
룰도 엄격했다. 상대의 노래가 끝난 후 3분 안에 안 나오면 실격이다. 가곡이나 동요를 부르면 1점 마이너스, 1절만 부르고 버벅거려도, 같은 노래를 불러도 감점이다. 3절까지 부르면 1점 추가. 김지하는 주로 2절까지, 이 교수는 3절까지 불렀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이 교수는 곡명이 떠오르지 않으면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빠져나와 커닝페이퍼를 훔쳐보았다. 명함 크기 종이 앞뒤에 400곡을 이니셜만 빼곡히 적은 후 상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새벽 5시30분 경, 첫 곡을 부른 후 8시간이 지났다. 창밖으로 먼동이 틀 때쯤 갑자기 김지하가 “에이, 징그럽다”면서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이 교수는 “승패는 정해진 거였다. 처음엔 이 일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10년 세월이 흐르고 나서 내 시집 발문에 김성동 씨가 전모를 밝히면서 세상에 공개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의 머릿속에는 1930~ 1980년대 가요 700곡이 담겨 있다. 그것도 3절까지. 이 부문 신기록일 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많은 노래를 기억하고, 그 일이 또 어떻게 가능한 걸까.
“제가 1950년생에요. 어머니가 피난 가서 나를 낳고 영양부족에 산후조리 못하고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어요. 다른 어머니가 들어와 내 소년시절은 서러움도 잘 타고 눈물도 많았던 고달픈 시간이었어요. 집에 진공관 라디오에서 이난영·황금심·송민도·박향림 같은 여자 가수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하고 어머니 목소리를 듣는 거 같고 그랬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노래가사를 종이에 베끼고, 한 번 들으면 금방 외우고 그랬어요. 중학교 친구 집에 있는 음반 자켓 뒤에 수록된 가사를 그대로 적어놓고 외우기도 했지요. 있는 집 아이들이 브람스·베토벤에 심취할 때 저는 철저하게 가요만 들었어요, 그게 내 노래 실력입니다.”


  
▲ ‘유정천리’가 최근 발간한 ‘강석연 대표곡집’ CD 표지.

이 교수는 옛 가요를 사랑하는 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의 회장이다. 이 모임은 김지하를 변론했던 경기고 출신의 인권변호사 홍성우 변호사가 주축이 된 ‘문화문’에서 파생됐다. 문화문은 대학생 대상의 국악 진흥을 도모했다. 여수·순천에서 전국국악대회도 열었다. 시간이 흐르자 가요 쪽도 그럴 필요성을 느꼈다. 잊혀져가는 옛 노래를 관리하고, 가요사를 복원해 대중에게 돌려주어야겠다는 것. 가수 박재홍이 부른 ‘유정천리’에서 따왔다. 원래 이 곡은 동명의 영화에 삽입된 곡이다. 정이 있는 사람들이 천리의 인생길을 같이 걸어가면서 가요를 즐기고 발전시키자는 취지다. 지난 2010년에 설립됐다. 작가 정호승, 장유정 단국대 교수, 탤런트 김용민, 이준희 성공회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우리가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일을 했어요. ‘황성옛터’를 부른 이애리수의 대표곡 선집 CD를 만들었고, ‘이별의 부산정거장’ ‘감격시대’를 부른 남인수 전집도 CD 12장으로 작년에 선보였어요. 문체부에서 예산을 지원해준다고 해도 못 해낼 일을 우리가 자체적으로 한 겁니다.”
1년 전 사망한 작사가 반야월의 대표곡 CD를 올봄에 냈다. ‘애수의 소야곡’ 작사가 이부풍(본명 박노홍)의 CD에 이어 지난 5월, 강석연의 대표곡 37곡을 담은 2장짜리 CD를 냈다. ‘강석연 대표곡집’ 제작 배경에 믿기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
“강석연은 1931년 데뷔해 1937년까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최고의 가수에요. 히트곡도 많고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맑고 아름답다고 해 ‘조선의 꾀꼬리’라는 애칭이 붙었어요. 강석연은 생전에 가수 사실을 숨겨 자식들은 어머니가 가수였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컸고, 이번에 CD가 나오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겁니다.”


강석연은 17세의 나이로 당시 콜럼비아 레코드사의 전속이 되어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방랑가’ 등 130편의

노래를 발표했다. 이들 노래는 일제에 시달리는 우리 민족의 힘겨운 삶에 밝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주고

그들의 아픈 상처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례로 강석연의 ‘모던 사랑’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오늘날의 사랑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서울의 모던 아씨 맵시 좋은 아가씨 굿모닝/장안의 거리거리 수놓는 임자여 아이러브콜/ 발발 떠는 망나니는 구두쇠 갓뎀/엎드려 살려 줍쇼 빌어도 돈 없는 그 사랑 아이캔낫”
당시도 가난한 사람과의 사랑은 원치 않는다는 그릇된 세태를 풍자한 가사이다.


강석연은 일본 공연 중 그곳에 유학했던 방태영(매일신보 논설위원)을 만나 결혼해 슬하에 4형제를 두었다.

방태영은 6·25 때 북에 끌려간 이후로 생사를 모른다. 강석연은 미용사자격증을 따 인사동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둘째 아들 방열 대한농구협회장은 중학교 시절 집안에서 어머니가 마이크 앞에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그 순간 어머니가 화를 내고 사진을 빼앗았다고 기억했다.
“어머니는 일체 자신이 가수란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요, 이번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어머니의 노래를 생전 처음 들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어요.”


이 교수는 신문과 방송에 출연해 옛 노래에 얽힌 다양한 사연을 전달해왔다. ‘한국의 대중가요와 생활사’란

인터넷 강의는 7년 전부터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학생들이 강좌제목만 보고 선뜻 신청했다가 일주일 만에 ‘속았다’고 그래요. 제가 그러죠. 요즘 노래 뿌리가 그 시절 노래이다. K팝의 뿌리라고 생각하고 들어봐라 그럼 애착이 갈 거다. 학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의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대구 MBC라디오에서 ‘이동순의 재밌는 가요이야기’(2003~2008년)란 1시간짜리 프로를 맡기도 했다. 요즘은 미국 워싱턴DC에 본부를 둔 자유아시아방송에 ‘남북이 함께 듣는 노래’란 제목으로 단파라디오방송을 한다.
“옛 노래 가사를 보면 당시의 서민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어요. ‘오빠는 풍각쟁이’라는 박향림의 노래를 예로 들면 ‘떡볶이나 갈비찜은 오빠가 차지하고, 나에게는 오이지나 콩나물만 준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요. 서민들의 밥상 메뉴이지요. ‘선술집풍경’이라는 김해송의 노래에는 술안주가, ‘기생점거’라는 노래에는 명월관·동명관 등 서울에 있는 술집 9곳이 나오고, 기생들이 인력거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도 나와요. 철도와 항구를 노래한 곡도 있고, 두만강·백두산·만주·시베리아를 무대로 한 노래도 있어요.”
그는 SP음반을 1000장 가지고 있다. 그 중에 강석연 음반도 여러 장 있다. 강석연 CD가 그래서 가능했다.
“시간 나는 대로 지방의 골동품 가게를 돌아다니며 사들인 겁니다. ‘유정천리’의 한 회원은 SP음반을 1만장이나 가지고 있어요.”


이 교수는 노래를 하라고 하면 걱정이 앞선다. 머릿속에서 수백곡이 서로 나오겠다고 해서다. 주로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 고운봉의 ‘명동블루스’를 즐겨 부른다.
이 교수는 대구 경산시 영남대 부근의 노인치매요양원에서 노래봉사를 해오고 있다. 색소폰, 아코디언을 메고 이들에게 연주를 들려주고 노래도 부른다. ‘비 내리는 고모령’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을 부르면 노인들은 처음에 눈은 딴 곳을 바라보고 입으로만 따라한다. 나중에는 시선을 이 교수에게 향하고 입가에 미소를 띈다.
“가요는 치매예방에 확실히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치매에 걸린 분들에게 ‘이 노래 아시겠어요, 불러보세요’라고 하면 입을 움찔거립니다. 노인대학에 가서 제가 농담을 해요. ‘노래 한곡이 보약 1첩과 같다. 오늘 내가 노래 8곡을 준비해왔다. 모두 몇 첩인가요’하고 물으면 ‘8첩’이라면서 좋아하고 박수 치고 그래요.”


이 교수도 나이가 들면서 가요의 위력에 공감한다. 젊었을 적에는 술 먹고 우쭐거리며 불렀지만 50이 넘고

환갑을 지난 요즘은 노래 가사가 지닌 상징성에 가슴이 촉촉해지고 눈물이 맺힐 때도 있다.
이 교수는 올해 문단 데뷔 40년이다. 1973년 동아일보에 ‘마왕의 잠’이란 시로 데뷔했다. 그동안 시집 24권을 냈고, 평론집·에세이집 등 책 54권을 썼다. 정지홍문학상·김삿갓문학상·시와시학상·신동집창작기금 등 굵직한 상을 받았다.
“유정천리는 앞으로도 옛 가수들의 노래를 복원해 CD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가요사박물관을 세우는 게 꿈입니다.” 

 


[이동순 교수가 들려주는 옛 배우 이야기] 비극배우 전옥의 삶과 노래

  

1950년대 대구에는 제법 이름 있는 극장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10대 후반의 소년이었던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극장 구경을 더러 다녔습니다. 참으로 오래된 극장인 만경관(萬頃館)도 갔었고, 대구극장에도 갔었습니다. 아버지가 즐겨 찾던 극장의 프로그램은 주로 비극을 테마로 하는 영화였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워낙 힘겹고 고단하던 시절이라 비극을 보는 경험은 자신의 가슴 속에 쌓인 한과 슬픔을 털어내는 여과와 조절의 시간이었습니다. ‘목포의 눈물’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로 기억됩니다.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비극 테마 영화의 대부분에서 단골 배역을 도맡았던 한 배우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전옥(全玉)입니다.
영화배우 전옥은 1911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전덕례(全德禮)이지요. 함흥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집에서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을 기웃거리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오빠 전두옥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습니다.


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토월회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습니다. 당시 16세의 전옥은 사슴 같은 눈에 콧날이 오뚝하여 이목구비가 뚜렷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토월회 무대에 섰고 ‘낙원을 찾는 무리들’(황운 연출·1927)에서 주연을 맡은 경험도 있었습니다.
전옥은 곧 신일선을 대신해 나운규 프로덕션의 대표 여배우가 되었고, 연이어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에서 주연을 맡으며 스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전옥은 토월회 무대에서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극단이 해산하게 되면서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따라 무대를 떠나 영화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맨 처음에는 나운규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28년 17세의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강홍식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 강홍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노래를 생방송했고 방송극에도 출연했습니다. 19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환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독백으로 유명했으며 비극의 여인 역을 잘 해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1930년대 전옥은 강홍식과 함께 많은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발매된 그녀의 음반은 강홍식과 함께 발표한 여러 노래들과 ‘항구의 일야’로 대표되는,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을 레코드에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중 1934년 강홍식이 발표한 ‘처녀총각’은 10만 장이라는 엄청난 양이 팔렸습니다. 큰돈을 번 강홍식은 일본 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정을 떠났고 해방 후 월북했습니다.


그녀는 라미라 가극단에서 나운규의 ‘아리랑’을 각색한 ‘아리랑’(1943)을 비롯해 많은 가극을 공연했습니다.

가극에 출연하면서 그녀는 다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영화계는 친일영화만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 후 전옥은 전국순회공연을 하던 남해위문대를 백조가극단으로 개칭하여 악극을 공연했습니다.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즈음 전옥은 극단의 살림을 맡던 일본 유학파 출신 최일과 재혼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전옥은 다시 영화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1957), ‘눈 나리는 밤’(1958), ‘목포의 눈물’(1958) 등을 영화로 만듭니다. 60년대 이후 전옥은 무대와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1969년 10월 전옥은 고혈압과 뇌혈전 폐쇄증으로 5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자식들은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영화배우 최민수의 모친인 배우 강효실과 북한의 대표적인 인민배우 강효선이 그의 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