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란 말은 고향마을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 고향마을 동구 밖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큰 이름이다.
근간의 화제작이었던 영화 ‘국제시장’은 험난한 세월을 살아온 이 땅의 아버지와 그 존재성에 대한
새삼스런 깨달음을 갖게 했다. 아버지에 대한 이런저런 상념에 젖노라니 나 또한 눈물이 핑 돌고 그리움이
왈칵 치밀어 올라 망연히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전쟁 중 피난지에서 나를 낳으시고 출산 직후 병을 얻어 열 달 만에 이승을 뜨실 때 아버지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어린 핏덩이를 포대기에 싸서 품에 안고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은 산모를 찾아다니면서
동냥젖을 구걸하셨다던 아버지 모습이 그려진다.
아버지가 말씀 중 자주 보이던 쓸쓸한 헛웃음도 바로 이 무렵에 생긴 습관인지 모르겠다. 절구에 쌀을 갈아
말린 홍합을 넣고 암죽을 끓여 한 숟갈씩 떠먹여주시며 제발 탈 없이 자라기를 기도하시던 아버지
흉중(胸中)은 오죽하셨으랴? 온몸에 펄펄 열이 오른 어린 나를 등에 업고 방바닥에 엎드린 채 꼬박 기도하며 밤을 새우셨다던 아버지의 마음을 내 나이 예순이 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유난히 굴곡과 파란이 많았던 우리 현대사는 한 가정의 아비가 고향집에서 가족들과 더불어 평화로이
살아갈 환경을 보장해주지 못하였다. 제국주의식민지의 수탈경제 속에서 굶주리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 땅의 아비들은 일본, 중국,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징용, 지원병 따위의 이름으로 또 고향집을 떠나셨다. 해방되고 무사히 돌아온 아버지는 그 수가 현저히 적었고, 만리타국에 백골을 묻은 이는 부지기수였다.
아버지를 테마로 한 노래의 효시는 아마도 판소리 ‘심청가’ 중 ‘부친이별가’를 먼저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가요시대로 접어들어 출현한 맨 첫 작품은 1932년 5월에 발표된 김연실의 유행소곡 ‘아버지’였다.
1934년에는 ‘아버지 경제(經濟)’(박영호 작사, 한정희 노래, 태평 8110)란 노래와 ‘아버지 영전(靈前)에’(김능인 작, 신불출 낭송, 오케 1689)란 시낭독도 나왔다. 이후 1935년 12월 오케레코드에서 발매된 유행가 ‘아버지는 어데로’(신불출 작시,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오케 1840)와 ‘잃어버린 아버지’(조명암 작시,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오케 12256)가 등장하고 있다. 이 노래들 속에서 무너진 시대의 아버지 표상은 실감나게 그려진다.
‘아버지는 어데로’에서는 ‘문밖에 가랑잎만 버석해도 소스라치는 마음’, ‘바람에 문풍지만 울어도 저릿한 가슴’이란 대목이 보인다. 타관객지로 떠나가서 소식조차 두절된 가장의 안부가 궁금해서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은 이처럼 안절부절하였으리라. ‘남편의 그림자를 찾아서 헤매는 일만 가지 생각’이란 대목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잃어버린 아버지’의 노랫말은 더욱 우리의 폐부를 아리게 한다.
아버님 아버님/ 목메어 부릅니다요/ 낯 설은 타향하늘/ 올 데 갈 데 없는 쓸쓸한 곳에서/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 불으며 헤매입니다/ 불쌍한 이 운명에 떠도는 딸자식은/ 흐득여 우나이다 대답하서요
아버님 아버님/ 어데로 가시였나요/ 오늘도 창문 열고/ 구름 가는 곳을 바라만 봅니다/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 헤진 지 몇몇 핸 가요/ 세상을 모르고서 응석을 부리던 몸/ 봄맞이 스물 두해 울었나이다 (‘잃어버린 아버지’ 전문)
노래속의 아버지는 어디로 떠나가서 이토록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곳은 필시 만주나 중국이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아버지’와 동일한 음반의 B면에 수록된 노래는 ‘이역(異域)에 우는 사나히’(김용호 작시, 손목인 작곡, 이인권 노래)이다. 그 ‘이역에 우는 사나히’는 다름 아닌 ‘잃어버린 아버지’, 즉 1930년대의 가장들이었던 것이다. ‘눈물로 고향 역을 떠나온 후로/ 북만주 벌판에서 내가 웁니다/ 아, 어머님! 음, 아버님! 바람 치는 타국거리/ 하, 내 고향아! 털벅털벅 헤매입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머나먼 곳으로 무작정 떠나왔지만 뜻하는 일은 제대로 성취가 되지 않고,
서러운 떠돌이신세를 면할 길은 막연할 뿐이다.누가 이 땅의 아버지들을 따뜻하고 포근한 가족의
보금자리에서 그토록 등 떠밀어 내쫓고 바람찬 거리를 표랑하도록 만들었던가.
이젠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이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도록 우리가 마음으로 먼저 배려하고 위로해 드리는
정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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