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낙화유수’와 김영환의 생애- 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논객닷컴 2015.10.28

가포만 2016. 12. 19. 11:27

지난 한가위 보름달은 슈퍼 문(super moon)이어서 그랬던지 유난히 크고도 밝았습니다.

밤하늘에 휘영청 밝은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 아버님의 품에 안겨서 배웠던 노래 하나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입으로 흥얼거렸습니다. 그 노래의 첫 소절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가을달밤의 고즈넉한 풍경과 분위기로 펼쳐집니다.

바로 그 노래, 한국 최초의 창작가요였던 ‘낙화유수(落花流水)’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한번 펼쳐볼까 합니다. 낙화는 떨어지는 꽃, 유수는 말 그대로 흘러가는 물이란 뜻입니다. 떠나가는 봄, 한때 번성했던 세력이 보잘 것 없이 쇠퇴해가는 것을 비유해서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속적 권위가 영원무궁한 것은 아마도 이 세상에선 없겠지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세력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며 터무니없는 호기와 만용을 부리고 거드름까지 피웁니다.

한국가요사에서는 낙화유수란 제목의 두 가지 노래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낙화유수는 가요황제 남인수가 불렀던 노래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로 시작되는 작품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강남달’로 알려진 노래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작품입니다. 흔히 ‘강남달’로 불리기도 하는 이 노래의 원제목은 낙화유수입니다.

192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88년 전, 극장 단성사(團成社)에서 상영되었던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로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되었습니다. 영화는 만능 대중연예인 김영환(金永煥)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개봉되던 날, 단성사 무대 아래에서 12세 소녀가수 이정숙(李貞淑)이 파들파들 떨리는 가련한 목소리로 이 노래를 마이크 앞에서 불렀습니다. 이정숙은 이 영화의 감독을 맡았던 이구영(李龜永, 1901~1973)의 누이동생으로 유명한 음악가 홍난파 선생으로부터 동요를 지도받고 있었지요.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불망초(不忘草)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우네

멀고 먼 님의 나라 차마 그리워
적막한 가람 가에 물새가 우네
오늘밤도 쓸쓸히 달은 지노니
사람의 그늘 속에 재워나 주오

강남에 달이 지면 외로운 신세
부평(浮萍)의 잎사귀에 벌레가 우네
차라리 이 몸이 잠들리로다
님이 절로 오시어서 깨울 때까지

-낙화유수(강남달)- 전문

  
▲ ©플리커

영화각본을 쓰고, 주제가의 작사, 작곡까지 도맡았던 김영환은 1898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했습니다. 작사, 작곡활동을 할 때는 김서정(金曙汀)이란 예명, 변사활동을 할 때는 본명 김영환으로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주임변사 노릇까지 담당했던 당대 최고의 인기인이었으며 영화감독에다 바이올린 연주까지 잘 했으니 참으로 다재다능한 그에게 이목이 집중되었고, 장안의 화제가 드높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24년 영화 ‘장화홍련전’ 감독으로 첫 데뷔했던 김영환에게는 그러나 지울 수 없는 출생의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진주권번 기생으로 김씨 성의 청년화가와 사랑에 빠져서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 태어난 아기가 바로 김영환입니다. 하지만 권번대표는 기생을 다른 부잣집 첩실로 들여보내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청년화가는 오해를 품고 냉정하게 애인을 떠나버립니다. 낙담에 빠진 기생은 아기를 혼자 남겨둔 채 진주 남강으로 나가서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어 자란 김영환은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깊은 트라우마를 항시 잊지 못합니다.

마침내 영화감독으로 성공한 김영환은 어머니의 비극적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 한 편을 기획제작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무성영화 낙화유수였던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기생 춘홍(春紅)의 배역은 충남 보령 출신의 배우 복혜숙(卜惠淑, 1904~1982)이 맡았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춘홍이 강물로 투신하러가는 장면에서 변사 김영환은 울음 섞인 절규로 목이 메었습니다.

“강남의 춘초(春草)는 해마다 푸르고
세세년년(歲歲年年)에 강물만 흘러간다.
아, 남방(南方)을 향하야 떠난 기생 춘홍의 운명은
장차 어찌나 될 것인가?”

  
▲ ©플리커

무성영화 시절, 김영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항시 말쑥한 용모에 고급스런 양복차림으로 인력거에 앉아서 권번을 향해가는 그의 화려한 모습이 장안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김영환에게 환심을 얻으려는 여인들이 줄을 이었고, 김영환은 그들에게 물 쓰듯 돈을 뿌려 댔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은 곧 비정하게 변하는 법. 무성영화 시절은 떠나가고, 1930년대부터 토오키(talkie)를 기본으로 하는 발성영화시대가 펼쳐지게 되면서 김영환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시들고 말았습니다. 시에론레코드사에서 예전처럼 만담, 난센스, 유행가가사 등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으나 이미 그의 전성기는 지나간 다음이었습니다. 뒤이어 찾아온 좌절과 방황을 이기지 못하고 김영환은 아편에 손대기 시작하다가 기어이 마약중독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길가에서 구걸하는 거지로 떠돌아다니다가 1936년, 비참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영화 <낙화유수>의 여주인공 역을 담당했던 배우 복혜숙은 충무로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있던 김영환을 직접 만나 약간의 용돈까지 전해주었다는 회고담도 있지만 사실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구체적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화가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재주꾼 김영환은 자신의 출생과정에 얽힌 자전적(自傳的) 슬픈 이야기를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아냄으로써 영화 낙화유수는 한국근대민족문화사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훌륭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노래 낙화유수는 한국가요사에서 최초의 창작가요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비록 비전문음악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가요작품이었지만 일찍이 중심을 잃고 방황하던 식민지시절에 대중문화의 진정한 방향성을 제시해준 중요한 방향키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10편 가량의 영화작품과 20편 가량의 가요작품으로 초창기 한국대중문화사의 빛나는 별이 되었던 대중연예인 김영환! 비록 그의 삶은 굴곡이 많고 불행하였으나 그가 흘렸던 땀과 노력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