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아리랑 절창을 부른 신인가수 유선원 2 매일신문 2014-03-06

가포만 2017. 1. 23. 17:12

홀로인 처녀의 가슴아린 심정 노래한 ‘가벼운 인조견을’

 
 
 

‘청춘명랑보’(靑春明朗譜)는 밝고 긍정적인 노래입니다. 곡조도 경쾌하고 발랄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1937년 10월의 세상은 그리 밝고 명랑하지 못했습니다. 그해 7월, 일제는 중일전쟁을 스스로 일으켜 놓고 식민지 조선의 각 도에 비상전시체제를 갖추도록 지시했습니다. 10월 1일에는 이른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 노예적 문장을 제정해서 식민지 백성들이 아침마다 늘 일본 왕이 있다는 동쪽을 보며 큰소리로 외치도록 굴욕적 삶을 강제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발표한 ‘청춘명랑보’의 빛깔과 의미는 전혀 살아날 수가 없는 망언에 가까운 것이었을 테지요.  


이제 우리는 유선원이 남긴 가요작품 중에서 가장 절창이라 할 수 있는 ‘가벼운 인조견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을파소(乙巴素)는 함북 경성 출생의 시인 김종한(金鍾漢`1914∼1944)의 아호입니다. 최고의 순간을 표현하는 선적(禪的)인 시풍에 능했다던 ‘문장’지 출신의 시인이었지요.


가벼운 인조견을 살짝 몸에 감고서/ 오늘도 나와 보는 노들강변 백사장

바람아 스리슬슬 치마폭을 놓아라/ 열여덟 이 마음을 너도 마저 하느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그리운 나라로 찾아를 가네

-<가벼운 인조견을> 1절

가사를 찬찬히 음미해 봅니다.


인조견(人造絹)이란 말이 나오는데요. 이 말은 인견(100% viscose rayon), 즉 목재펄프에서 추출해 만든 인공적인 순수천연섬유입니다. 얇고 가벼우며 땀 흡수가 빨라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촉감이 부드럽고 살에 달라붙지 않아 여름옷 혹은 여름침구용으로 적합하다는 평을 받습니다. 예전에 없던 이 섬유가 가사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인조견도 식민지적 근대문물의 하나로 떠오릅니다.


권번기생들이 여름옷감으로 선호했던가 봅니다. 인조견으로 만든 한복을

입었거나 인조견 목도리라도 두른 듯합니다. 아마도 초여름인 듯합니다.

작중 화자는 서울의 어느 권번 소속의 방년 18세가 되는 기생인데 수양버들이

드리워진 한강, 즉 노들강으로 산책을 나온 것 같습니다.

한강 주변의 봄 풍경이 너무도 깨끗합니다.


그런데 짓궂은 봄바람이 자꾸만 불어서 젊은 처녀의 치마를 펄럭이게 합니다.

강가의 수양버들은 이미 짙푸른데 거기에 날아 앉는 제비들도 암수가 함께

노니는데 처녀는 자신이 혼자인 것이 그렇게도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할 말도 채 못하고 이 가슴만 떨려서’ 이 대목은 기막히는 처녀의 심정을

얼마나 고스란히 전해줍니까? 저 멀리 강물위로는 나룻배가 보입니다.

뱃놀이하는 사람들은 조각배를 타고 봄노래를 구성지게 부릅니다.


‘청춘도 물결이라 가기 전에 이 봄을’과 ‘열여덟 수집은 때 까닭모를 눈물만’이란 대목이

어찌 그리도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지요. 한국적 정서의 전형적 풍광을

너무도 실감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각 연의 후렴이 또 이 작품의 아름다움을 고조시켜줍니다.

‘아리랑 그리운 나라로 찾아를 가네’에서 ‘그리운 나라’는 과연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주권을 잃어버린 민족의 고토(故土)를 떠올리게 하는 은유와 상징성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그러한 그리운 나라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을파소 김종한 시인의 뛰어난 문재(文才)가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