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북방정서를 노래한 가수 유종섭 ② 매일신문 2014-03-27

가포만 2017. 1. 23. 17:20

가수생활 3년 만에 낙향해 가업 이어

 
 
 

유종섭이 가요계에서 활동했던 3년 동안의 경과를 두루 살펴보면 첫해는 ‘아리랑’ ‘수부의 꿈’ ‘광야의 달밤’ ‘내 갈 길이 어듸메냐’ ‘방랑애곡’ ‘이 마음 실고’ 등 6편을 발매했지만 ‘광야의 달밤’ 이외에는 뚜렷한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해 12월, 매일신보에 추문으로 가득한 악의적 보도에 휘말리는 불운까지 겹쳤습니다.


1937년에는 14편의 가요곡을 발표하는데 이 가운데서 ‘단장애곡’ ‘유랑의 곡예사’ 두 곡이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서 그나마 체면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음반으로 유종섭 노래를 들어보면 차분하고 안정된 창법은 그런대로 들을 만한데 특별히 내세울 수 있는 깊이와 울림, 개성의 작용은 없는 편이었지요.

팔다리 피곤하다 이슬도 차다/ 흘러가는 신세라 한숨 무거운데

고향 그린 무리들 눈물만 흘리고/ 밤 깊은 이 거리 노래만 처량쿠나

-’유랑의 곡예사’(이하윤 작사, 탁성록 작곡, 콜럼비아 40767) 부분


1938년은 가수 유종섭에게 몹시 바쁜 한 해였습니다. 10곡가량의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각종 무대공연과 방송출연 요청이 밀려들었습니다. 1938년 2월 22일 부민관에서 열린 ‘대중연예의 밤’에 유종섭은 표봉천, 장옥조, 박향림, 임옥매, 김해송, 김인숙, 박단마, 장일타홍, 선우일선, 조영심 등과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날 가수 프로필을 알리는 신문기사는 유종섭을 ‘스마트 뽀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종섭이 불렀던 가요곡 중에 ‘뚱보의 서울’이란 만요(漫謠)가 있었는데 이 노래와 관련해서 1938년 8월 일제가 발간한

‘조선출판경찰월보’ 제120호의 기록은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줍니다.

고마부 작사, 정진규 작곡의 이 음반은 풍속괴란, 치안방해 등의 이유로

일제당국에 의해 출판금지 처분이 내려집니다.

콜럼비아사에서는 이후 ‘뚱딴지 서울’로 제목과 가사를

일부 수정해서 다시 발표합니다.


이 무렵 함경북도 회령에서 사업에 종사하던 부친은 아들이 하루빨리

돌아와 가업을 이어받기를 재촉하는 전화와 편지를 줄곧 보내왔습니다.

유종섭도 서울에서의 가수생활 3년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특별한 히트곡도 내지 못했고, 그에 따라 레코드회사에서의 위치도 점점

뒷전으로 밀리는 것을 눈치 챈 유종섭은 서울생활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미련 없이 고향으로 떠나갔습니다.


대중들의 인기와 환호 속에 살아가는 가수로서 그것의 빈약함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가요계에 엉거주춤 남아있는 모습이란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 것일까요?  

1939년 4월 25일 실린 동아일보 특집기사는 가수 유종섭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의

소식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약진 회령의 전모’란 제목의 이 기사는


당시 26세의 유종섭이 가수활동을 중단하고 부친의 물산위탁업체인 창덕상회를

이어받아 사업 규모를 확장하는 일에 전심전력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그토록 소망하던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나 환경이 유종섭으로 하여금 가수로서의 인기와 명망을

유지시켜 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종섭은 재빨리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업가로 변신했습니다. 아들의 이런 결정에 가장 흐뭇하고

기뻤던 사람은 부친이었을 것입니다.


분단 이후 유종섭의 소재나 근황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북에 남아 있었다면 김일성 정권하에서 틀림없이 반동 부르주아 계급,

악질적 지주자본가로 분류되어 즉시 처형되었거나 무자비한 숙청의 회오리

속에서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