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李東洵 교수의 歌謠 이야기(10) - 「얼굴 없는 가수」 孫仁鎬 월간조선 2001년 10월호

가포만 2017. 2. 8. 19:01

낡은 전축과 LP판
 
 
  4·19 혁명이 나던 무렵 나는 열 살의 소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생으로 어느 날 길가에 서서 도로를 메우고 숨가쁘게 달려가는 데모 군중을 보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라본 그것은 하나의 성난 파도였다. 우르르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지축을 울리며 가슴 저 밑바닥을 와들와들 떨게 하던 그 긴장과 격정의 분위기는 오래도록 내 기억의 한 켠에 강렬한 흑백사진으로 남아있었다. 어린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 그 날의 사뭇 몸 떨리던 경험은 항시 수분을 잔뜩 머금은 토양처럼 내 정신의 갈증을 적셔 주는 자양분으로 작용하였다.
 
  낡고 빛 바랜 축음기가 친구의 집 벽장에서 수십년 세월의 어둠을 지내오는 동안, 세상은 조금씩 조금씩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아니하는 것들이 뒤섞여 한바탕 소란으로 뒤숭숭하였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축음기를 즐겨 찾는 사람은 점차 드물어졌다. 그들은 이제 작고 앙증맞은 일본제 트랜지스터를 손바닥에 품고 다니거나, 더욱 개량된 LP판을 커다란 목재 장식이 아름다운 전축으로 잔뜩 멋을 내며 듣고 있었다. 

  
  그 전축들의 이름은 빅터, 실바니아, 혹은 마그나복스, 가라드 등등 이런 멋스럽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전원에 플러그를 꽂으면 초록빛 작은 알전구가 환상적 아름다움을 연출하며 은은하게 켜지고, 이와 동시에 그 불빛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일시에 빠져들게 하였다. 이런 전축들도 다소 집안이 부유한 친구네 집에 가야만 구경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음반을 올리고 스위치를 켜면 턴테이블 위의 암대가 저절로 돌아가서 아주 부드러운 몸짓으로 우아하게 음반의 적절한 지점에 가서 사뿐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암대 끝의 바늘이 검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음반 위에서 멋진 스케이팅을 연출하는 동안, 스피커에서는 중후하고 품격 높은 소리가 목재의 스쳐오는 은은한 질감으로 자신의 고유한 소리를 들려 주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 기억을 잊지 못한다. 가끔 서울 황학동의 고물 상점들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더욱 초라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한 켠에 덩그렇게 놓여 있는 낡은 전축의 광경을 만날 수 있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어본다.
 
  『험한 세월은 그대에게 얼마나 시달림을 주었던고?』
 
  이때 낡은 전축은 흐릿한 눈빛으로 감회에 젖어서 나를 본다. 나는 전축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지만 그의 형언할 길 없는 얼굴 표정과 默言(묵언)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이런 경험을 몇 차례 하던 끝에 드디어 하나의 목재 전축 한 대를 드디어 화물차 짐칸에 실어서 나의 거처로 실어 옮겨왔다. 컴컴한 방 안에서 나는 전축과 마주 앉아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나는 하얀 걸레를 들고 와서 전축의 얼굴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겉에 묻은 세월의 찌든 때를 밤 깊도록 닦으니 나무결의 본래 빛깔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걸레로 구석구석까지 정성스레 닦아내고 고장난 전선도 말끔히 정돈하고 손을 본 다음 전기를 넣었다.
 
 
  「얼굴 없는 가수」 孫仁鎬
 
 
  음반을 무엇으로 올릴까 하다가 마침 가수 孫仁鎬(손인호)의 음반이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서 맨 끝 곡으로 실려 있는 노래 한 곡을 들었다. 

  
 < 원통하게 죽었고나 억울하게 죽었고나

/ 몸부림친 3·15는 그 누가 만들었나

/ 마산시민 흥분되어 총칼 앞에 싸울 적에

/ 학도 겨레 장하도다 잊지 못할 김주열

/ 무궁화 꽃을 안고 남원 땅에 잠들었네
 
  남원 땅을 떠날 적에 성공 빌던 어머니는

/ 애처러운 주검 안고 목메어 슬피 울 때

/ 삼천 겨레 흥분되어 자유민권 찾으려고

/ 학도 겨레 장하도다 잊지 못할 김주열

/ 무궁화 꽃을 안고 남원 땅에 잠들었네〉
 
  전축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히 소멸된 옛 기억의

창고에서 들려오는 웅얼거림이었다. 이 소리는 묘하게도 슬프고 서러웠던

옛 기억들을 모조리 일깨워서 마치 어항의 물을 갈아 줄 때처럼

그동안 쌓이고 쌓인 수족관 바닥의 찌꺼기들이 일시에 일어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실루엣으로

여기기엔 너무도 선명한 윤곽이었다. 나는 옛 전축의 스테레오

스피커에 귀를 갖다대고, 혹은 쓸쓸한 소년처럼 저만치 떨어져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고 이 소리를 감상했다.
 
  이 노래는 차경철이란 분이 작시를 하였고, 작곡가 韓福男(한복남)

이 곡을 만든 것을 손인호가 취입한 것이었다. 가수 손인호는 원래부터

「얼굴 없는 가수」로 널리 소문이 나 있을 만큼 공개적인 무대나 자리에

나타나질 않았다. 사람들은 손인호의 그런 태도에 대하여 오히려

더욱 신선하고 신비스러운 호기심마저 가졌다. 
  
  그는 처음부터 전문 가수는 아니었고, 녹음기사로 활동하던 분이었다고 한다.

그분의 독집 음반을 보면 「청춘등대」를 위시해서 참으로 좋은 노래들이 많다.

南仁樹(남인수)의 창법과 흡사한 면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독립성을 갖고 있었다.

남인수의 성음이 카랑카랑한 금속성이라면 손인호의 창법은 오

히려 부드러움에 바탕한 안정감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노래를 곧바로 비교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아무리 오래 들어도

쉽게 지치지 않는 매력은 오히려 손인호의 노래였다고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중들은 南仁樹의 노래에서 충족을 얻지 못하는 부분을

손인호의 노래에서 찾으려 하였다. 
  
  
  金朱烈의 장례와 민주주의 염원 담은 노래
 
 
  이 노래는 광복 후 우리 가요에서 몇 안 되는 특수한 노래가 아닌가 한다.

가사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지만 우선 자유당 일당 독재의 정권 연장을

위한 전형적 부정선거였던 3·15 총선의 타락과 불법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식이 들어 있다. 경남 마산에서 가장 먼저 시위가 촉발되었고,

시위대의 행렬에 앞장섰던 학생 金朱烈(김주열)이 독재정권에 의해 희생되어

마산 앞 바다에 시신이 버려졌던 것이다.
 
  이 비극적인 주검이 물 위로 떠오르자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민주주의의 쟁취를 부르짖는 전국적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문단에서 4·19 정신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詩작품이 金洙暎(김수영)과

申東曄(신동엽)에 의해서 제출되기 시작했다. 가요계는 이 노래를 필두로

여러 편의 작품이 제작되어 음반 발매 때 다른 노래들과 함께 배포하였다. 
  
  가요 「남원 땅에 잠들었네」는 金朱烈의 장례와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작품이다. 이 노래의 1절이 끝나고 2절이 시작되기 전

슬프고 애절한 목소리의 대사가 펼쳐진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수 王淑郞(왕숙랑)이 맡았는데, 다름 아닌 사망한 金朱烈군의 어머니가

비통하여 부르짖는 화법으로 엮어졌다.
 
 < 주열아! 남원 땅을 떠나 마산에서 공부하여 성공한다던

네가 죽다니 웬 말이냐? 그러나 내 아들 장하다. 지금은 슬프지도 않다.

네가 원하고 원하던 우리 민족의 자유는 학생들의 힘으로 찾고야 말았단다.

아! 주열아! 아! 주열아!>
 
  이러한 계열의 노래로 발매된 것이 SP음반으로 나온 다음 두 작품이다.

하나는 南仁樹의 목소리로 취입한 「사월의 깃발이여」이고,

다른 하나는 黃琴心(황금심)의 목소리로 담긴 「어머니는 안 울련다」이다.

앞뒷면에 녹음된 이 음반은 半夜月(반야월) 작사,

朴是春(박시춘) 작곡으로 羅花郞(나화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