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李東洵 교수의 歌謠 이야기(7) 滿洲 체험을 다룬 노래들 월간조선 2001년7월

가포만 2017. 2. 2. 19:14

동쪽은 두만강 간도살이 가는 물…

방황, 탄식, 저항의식 담아
 
 
  滿洲(만주)란 지명은 만추리아(manchuria)에서 유래된 말이다. 대개 중국의 동북지역을 통칭하는 용어로 北으로는 大興安嶺 북부 산지에서 南으로는 長白山 산지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지역이다. 지금의 연변 조선족자치주가 있는 지역으로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등 3개 지역이 이곳에 포함되어 있다. 그곳의 우리 동포들은 만주라는 용어를 매우 싫어한다.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은 서북 간도 일대이다. 한민족의 간도 이주 역사는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로 기아와 궁핍에서 벗어나 보려고, 혹은 학정과 가렴주구를 피하여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갔던 것이다. 이를 越江(월강)이라 했는데 이들의 집단 이주가 점차 문제가 되자 韓中 양국에서는 越江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밤에 몰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여전했다. 일제의 수탈정책이 가속화되던 1930年代 중반부터 다시 강을 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우리의 가요가 이러한 유랑민들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20年代 후반부터가 아닌가 한다. 「방랑가」(이규송 작사, 강윤석 편곡, 강석연 노래), 「오동나무」(이규송 작사, 강윤석 작곡, 강석연 노래), 「부활」(이애리수 노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초창기 유행가에 담겨 있는 주제는 대체로 방황과 탄식, 그리고 저항의식 등이었다. 먼저 「방랑가」를 보자.
 
 < 피 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움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닯은 이 내 가슴 누가 알거나>
 
  「방랑자의 노래」란 이름으로도 불려졌던 이 노래 가사의 정신적 배경은 실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젊은이의 피가 식은 것으로 묘사되었으니 그 청년은 죽음의 나락에 빠져 있다. 그는 극도의 恐慌 속을 지향 없이 헤매고 있다. 이 노래는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자주 불렀다고 한다. 「오동나무」는 진작 구전되어 오던 민요를 다시 정리 각색한 新민요풍의 노래이다. 그런데 이 노래의 5절은 매우 흥미롭다. 

  
 < 금수강산은 다 어데 가고요 황막한 산야가 웬일인가 에라 이것이 원한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당시는 일제의 무단통치가 휘둘러지던 시기였다. 그런데 어찌 이런 형태의 가사가 유통될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도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과거 일제 때의 유행가들은 보통 3절까지 있는 것이 일반이었으나 가끔은 5절까지 연속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빼앗긴 조국의 자주독립이나 해방의식의 고취는 가사의 맨 뒷부분에 슬쩍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있었다.
 
  오동나무도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한다. 李愛利秀가 불러서 히트했던 노래 「부활」은 톨스토이의 소설 작품을 소재로 만들었다. 그런데 번역소설의 내용에 슬쩍 의지하여 민중의 부활의지를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 시베리아 찬바람이 지구상에 떨치니 거리는 죽은 듯하나 실상은 살았도다/버려지는 땅에서 들썩들썩 하면서 양춘가절 기다리며 나오기를 힘쓰네>
 
 
  「동쪽은 두만강 간도살이 가는 물」
 
 
  일제의 수탈정책 기관으로 가장 선두에 섰던 東洋拓植會社는 「東拓」으로 불려졌다. 울던 아이들도 「동척」이 온다면 울음을 그칠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의 모든 토지를 교묘한 방법으로 빼앗아 일본 이민들에게 양도하였다. 작게나마 제 땅을 가졌던 영세농민들은 일본인 소유의 토지를 대신 경작하는 소작인으로 전락하였고, 생활은 점점 곤궁해져만 갔다. 부채는 늘어만 가고 쌀독에는 양식이 바닥이 났다. 더 이상 자신의 고향에서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다. 괴나리봇짐을 싸서 그 위에 달그락거리는 바가지를 매어 달고 소매에 눈물 닦으며 떠나갔다. 그들의 지향은 오로지 바람찬 북방이었다.
 
  일찍이 함경도 북청의 시인 李燦(이찬)이 詩 「북만주로 떠나간 월이」 등을 비롯하여 유랑민들의 처량한 심사를 詩작품으로 노래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시기였다. 이 무렵에 발표된 가요 「오대강 타령」(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 이난영 노래)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담고 있다. 

  
 < 북쪽은 압록강 뗏목 실어 오는 물/ 물 우에 자고 일고 몇밤이러냐/ 동쪽은 두만강 간도살이 가는 물/ 고향을 떠나갈 때 눈물은 깊어>
 
  긴 설명이 따로 필요 없다. 두만강 물살을 일러서 「간도살이 가는 물」이라 표현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삶과 처지를 그대로 그려낸 것이었다. 「국경의 부두」(유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 고운봉 노래)에는 압록강을 건너가는 한 渡江者(도강자)의 쓸쓸하고 비통한 심정이 반영되어 있다. 「눈오는 백무선」에는 함박눈이 펄펄 나리는 밤의 북국정서와 유랑민의 심정이 그려져 있다. 「애수의 압록강」(조명암 작사, 손목인 작곡, 이화자 노래)의 가사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칼로 저미어 내는 듯하다.
 
 < 아아 뗏목에 울며 간다/ 달빛은 푸르른데 세월도 야속하고 운명도 야속하다/ 아아 피눈물 흘리며 내 사랑 부른다/ 아아 아아 뗏목에 울며 간다>
 
  모든 것이 슬픔이었다. 자고 깨어나도 달라지는 것이 전혀 없었다. 상황은 갈수록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 오죽하면 시인 李庸岳이 그 시대를 표현하면서 「욕된 운명은 밤 위에 밤을 더 마련할 뿐」이라고 절규하였을까? 「향수열차」의 노랫말에는 이미 강 건너 만주 땅으로 들어선 유랑민의 망연자실한 정서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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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저문 저녁, 러시아식 페치카의 온기가 그리울 정도로 싸늘한 열차 안에서 외투로 둘러싼 몸을 오그리고 눈을 감으니 고향집이 눈에 떠오르더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아득한 유랑의 심리를 담고 있는 노래들은 부지기수이다. 「천리타향」(박영호 작사, 문호월 작곡, 남인수 노래)에서는 「아득한 지평선을 넘어 향방도 없이 눈오는 오로라 하늘 밑 어데선지 흐르는 고향」으로 그려져 있다.
 
 
  서러운 심경 대변, 高福壽가 으뜸
 
 
  방랑의식을 나타낸 또 다른 노래들로는 「오로라의 눈썰매」(조명암 작사, 김령 작곡, 남인수 노래), 「불멸의 눈물」(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김해송 노래), 「북국오천키로」(박영호 작사, 무적인 작곡, 채규엽 노래), 「국경열차」(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송달협 노래)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유랑극단」(박영호 작사, 전기현 작곡, 백년설 노래)과 「오동동 극단」(처녀림 작사, 이재호 작곡, 백난아 노래) 등은 유랑의 서러움을 대륙의 벌판을 떠돌아다니는 악극단에 비유함으로써 대중들의 큰 공감을 얻었다. 「간도선」(처녀림 작사, 이재호 작곡, 백난아 노래)도 암울한 시대와 유랑의 정서를 다룬 노래로 다시금 그 뜻을 음미해 볼 만하다. 

  
 < 희망길 간도선 사랑길 간도선/ 밤길에 지향 없는 밤길도 멀은 간도선/ 아아아 고동소리 바람에 불어/ 마음이나 본다 본다 서울을 서울을 본다 >
 
  만주의 유랑민과 그들의 서러운 심경을 다룬 노래를 많이 불렀던 가수는 단연 高福壽(고복수)가 으뜸이다. 그의 처량하고 쓸쓸하며 곧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우울하고 어두운 음색! 그러한 성음으로 高福壽는 만주 전역을 돌면서 「타향살이」(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를 불렀다.
 
 < 타향살이 몇 해 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