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李東洵 교수의 歌謠 이야기(3) 歌王 南仁樹 월간조선 2001년 3월호

가포만 2017. 1. 30. 12:41

애수와 정감으로 둘러싸인 목소리
 
  민족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노래 한 가지로 민족의 고통을 쓰다듬고

위로해 주었던 가수 南仁樹(남인수·1918~1962). 오늘은 살아생전 너무도 유명했었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삶 자체가 하나의 神話(신화)가 되어버린 아름다웠던 歌客(가객)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나이 지긋하신 분이나 젊은 청년들에 이르기까지 南仁樹가 불렀던

히트곡 「哀愁(애수)의 소야곡」과 「가거라 三八線」 「離別(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을

한 小節(소절)쯤 흥얼거리지 못하는 이는 아마도 없을 줄 안다.
 
  南仁樹가 일생을 통하여 취입한 노래는 헤아려보지 않아 뚜렷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림잡아 1000곡 가량 된다고 한다. 南仁樹 노래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란 어

려운 일이나 우울하고 암담한 시간의 저 밑바닥 深淵(심연)에 가라앉아서도

결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다부지고 결연한 목소리.

단단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카랑카랑하지만 애수와 정감으로 둘러싸인 목소리.

바로 그것이 南仁樹 聲音(성음)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南仁樹가 이런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혹독한 가난을 겪었고,

 타국 땅에서 소년 노동자로 갖은 천대와 멸시를 겪은 체험이

그의 삶과 노래에 肉化(육화)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도

고통받는 민족의 현실을 생각하였고, 보다 훌륭하고 적절한 성음을 만들기 위해

성악가 安基永(안기영)에게 찾아가서 發聲法(발성법) 지도를 받았던 일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가 한 사람의 가수로서 단지 개인적 삶에만 치우치지

아니하고 민족에게 사랑을 받는 가수가 되기 위해 애를 썼던

노력형의 가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南仁樹의 노래가 가장 아프고 절절하게 다가오는 시간은 어딘가에

시달려 심신이 몹시 피로하거나 곤비한 시간이다. 아니면 고단한 나그네길에서

돌아오는 경우라도 어울린다. 이러한 저녁 시간, 버스나 기차의 붐비는

공간이라면 더욱 어울린다. 이러한 시간에 성능이 보잘것없는 차량 스피커에서

뿌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뒤섞여 들려오는 정겹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

그것이 바로 南仁樹다. 
  
  이런 庶民的(서민적) 소란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아련히 들려오는 목

소리가 바로 南仁樹의 노래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南仁樹의 노래는 대개 流浪(유랑)과 鄕愁(향수),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과거의 회상, 인생의 애달픔 따위를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를 멋지게 불러대는 南仁樹의 성음은

어딘지 모르게 금속성의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그 느낌은 금속 특유의 차디찬 냉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

 한참 가사를 따라가며 새겨듣노라면 왠지 눈에 눈물이 핑 돌 것만 같다. 
  
  
 
작곡가 朴是春과의 만남
 
  그의 고향은 경남 진주이다. 이 지역은 이미 작곡가 李在鎬(이재호)를 비롯하여

藝能(예능) 방면에서 활동하는 많은 名人(명인)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본명은 崔昌洙(최창수)였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어머니가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강씨 문중으로 改嫁(개가)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서

姜文秀(강문수)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양부 밑에서의 생활이 편할 리 없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설움과 구박 속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얼마간의 돈을 훔쳐서

무작정 집을 떠나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후에는 어떤 선량한 사람의 소개로 사이타마縣에 있는

電球(전구) 공장에 취직하여 소년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생산 공장들의 작업 현실은 노동자들에게 너무도 가혹하고 힘겨운 악조건이었다.

그리하여 강문수는 이곳 저곳을 옮겨가며 노동자 생활을 이어 나갔다.

십대 후반의 나이가 되자 제철 공장의 노동자로 취업하여 한동안

쇠를 다루는 일을 하였다 
  
  쇳물을 다루는 중노동을 하는 가운데서도 강문수는 타고난 藝人의 「끼」를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일본 가수들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따라 불러서 주변

노동자들로부터 가수의 칭호를 들었다. 그러다가 나이 열일곱 살이 되자 드디어

 가수가 되려는 꿈을 안고 서울로 돌아와 시에론레코드社의 문을 두드렸다.

1935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당시 시에론레코드사의 文藝部長(문예부장)은

극작가이자 작사가인 朴英鎬(박영호)가 맡고 있었다.

이때 강문수의 복장은 일본식 「츠메에리」차림의 떠꺼머리총각이었다고 전한다.

또 어떤 자료에는 금단추 제복을 한 더벅머리 청년이었다고 한다.
 
  박영호는 이 청년의 자질을 테스트한 다음 작곡가 朴是春(박시춘)에게 데리고 갔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이 바로 한국歌謠史의 흐름을 바꾸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박시춘은 강문수의 음악적 자질을 발견하고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곧 「눈물의 海峽(해협)」을 연습하여 취입시켰다. 
  
  하지만 이 음반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그다지 시원치 않았다.

이때 박시춘은 소속 회사를 오케레코드로 옮기면서 이 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곡은 그대로 살리되 가사만 바꾸어서 새로 발표하는 계획을 가졌다.

改詞(개사)는 文壇의 작가 출신인 李扶風(이부풍)이 맡았다.

곡명도 「哀愁의 小夜曲(소야곡)」으로 바꾸었고 가수로서의

이름도 강문수에서 南仁樹로 새로 바꾸었다.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폭발적 인기를 얻어서 南仁樹는 가수로서 단번에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음반 판매점에서는 가게 앞에 留聲機(유성기)를 내다 놓고 달콤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불러 넘기는 南仁樹의 노래를 날마다 연속으로 틀고 또 틀었다.

언론들은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美聲(미성)의 가수 탄생」을 연일 보도하며

南仁樹의 출현에 대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달빛을 보면/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
 
  南仁樹는 무대에 오를 적에 항시 새하얀 플란넬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스타일을 즐겼다. 이 노래는 대중들의 반향이 워낙 컸으므로 일본어로도

취입이 되었는데, 당시 일본의 여가수 도도로키 유키코가 南仁樹와 함께 불렀다.

「哀愁의 세레나데」였다. 그러니까 「애수의 소야곡」은

南仁樹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다.
 
  가수로서의 맨 처음 데뷔 곡은 「눈물의 해협」이었고, 오케레코드로

옮겨온 뒤에는 「범벅 서울」(朴英鎬 작사, 孫牧人 작곡)이라는 노래가

데뷔 곡이었다. 이 노래는 1930년대 서울 장안의 대중적 풍경을 그린 것이다.

네온사인, 룸바, 탱고, 재즈, 왈츠, 인조견, 랑데부 등 온통 서구 외래문화의

범람 속에서 당시 청춘 남녀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정황을 담고 있다.
  
  「애수의 소야곡」의 前奏曲(전주곡)과 전체의 伴奏(반주)는 작곡가 박시춘이

직접 기타 연주를 적절히 활용하여 절묘한 효과를 이끌어 내었고,

이로부터 기타에 매료된 대중들이 늘어나서 한번 배워보겠다고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박시춘 南仁樹 콤비는

일제강점기 한국 가요사의 중심에 우뚝 자리한 양대 山脈이 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태평레코드의 李在鎬(이재호) 白年雪(백년설) 콤비와 멋진 맞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