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가수 이해연 ① 2014-04-17 매일신문

가포만 2017. 1. 30. 12:10

흐느끼는 듯 슬픔을 안으로 안으로 응축한 음색과 창법

 
 
 

가수 이해연(李海燕`1924∼?)을 흔히 민요가수라고 합니다만 모든 노래를 민요풍으로 부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음색과 창법이 유난히 구성지고 감기며 휘어지는 맛이 마치 바람에 사운대는 버들가지처럼 요염한 맛이 있음은 확실합니다. 이해연의 한자이름을 보노라면 해연(海燕), 즉 바다제비의 유연한 날갯짓과 지저귐이 그대로 눈과 귀에 들어오는 듯합니다.


이해연의 대표곡이 여럿 있지만 사람들은 대개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먼저 손꼽습니다. 1984년 언론에서 6`25 노래에 대한 대중들의 선호곡 통계를 내었을 때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1위에 선정될 정도로 이미 민족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찬찬히 음미하면서 들어보면 가수 이해연의 음색과 창법이 대단한 경지에 들어가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흐느끼는 듯 슬픔을 안으로 안으로 응축하면서도 기어이 조금씩 가슴의 틈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신음은 거의 통곡의 수준입니다. 한국전쟁의 상처를 겪지 않은 한국인은 그 누구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6`25는 민족의 의식과 바탕에 깊고 어두운 수렁의 몸서리치는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해마다 여름이 되면 이 노래는 TV와 라디오의 단골노래로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기어이 울먹울먹해진 가슴을 참다 못해 눈가에 눈물이 맺힙니다.


그런데 이해연이 이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완벽한 슬픔의 창법으로 승화시켜 노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수로서의 오랜 경험과 자질이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수 이해연은 1924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자료가 없습니다만 해방 직후 데뷔해서 ‘황혼의 엘레지’(1955)를 불렀던 가수 백일희(白一姬)와는 친자매였지요.


이해연은 17세인 1941년에 콜럼비아레코드사를 통해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이해연이 전속가수가 되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말 군국주의 체제가 극악한

몸부림을 보이던 암흑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 불똥이 어린 가수의 노래 취입에도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첫 데뷔곡은 일본인 작곡가 고하정남(古賀政男)의 작품에 한국인 작사가 이가실,

즉 조명암(趙鳴岩)이 가사를 붙인 번안가요 ‘백련홍련’입니다.

 말하자면 일본 엔카 원곡의 번안가요인 셈이지요. 일본영화 ‘熱砂の誓い’의 두 주제가

가운데 한 곡으로 만들었던 이 노래는 리샹란(李香蘭, 山口淑子)이 부른 ‘紅い睡蓮’을

그대로 번안한 노래입니다.


가사를 보면 ‘행복 찾아 가자네’ ‘사꾸라의 사나이’ ‘꽃이 피는 아세아’ 따위의

군국주의적 특성이 느껴지는 구절들이 눈에 거슬립니다. ‘청란(靑蘭)의 꽃’ 가사에도

‘새 살림 새 깃발’이라든가 ‘동아의 새 세상’ 같은 대목이 확인됩니다.

 ‘고향산천’에도 ‘나랏님께 충성’이란 표현이 보입니다. ‘꽃 실은 양차’ ‘안남아가씨’에도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이 반영된 흔적이 엿보입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의 패전이 임박한 가운데 이해연이 발표했던 음반 중에는

‘아리랑 풍년’이란 것도 있습니다. 일제가 식량을 비롯한 모든 것을 공출(供出)이란

이름으로 수탈해갔던 그 모진 궁핍의 시절에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말도 되지 않는 모독에 불과한 내용입니다.


가장 희극적이고 난센스라 할 만한 노래는 1943년, 역시 리샹란과 함께 부른 ‘영춘화’일 것입니다.

전체 3절로 구성된 이 노래는 각 절이 한중일 3개국의 언어로 다채롭게 펼쳐갑니다.

창문을 열어치면 아카시아의/ 새파란 싹이 트는 늦은 봄 거리

페치카 불러다오 이별의 노래를/ 봄바람 불어 불어 영춘화

一朵開來艶陽光/ 兩朵開來小鳥唱/ 滿洲春天好春天/ 行人襟上迎春化

春お知らせる花ならば/ 人の心もおかる苦

今宵彼の君何おか想う/ 我にささやけ迎春化

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