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李東洵 교수의 歌謠 이야기(2) - 白年雪과 「나그네 설움」월간조선 2001년 2월호

가포만 2017. 1. 30. 12:34

李東洵
詩人·영남대 국문과 교수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詩 당선,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제5회 신동엽 창작기금 수상.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저서 「민족시의 정신사」 등. 편저 「백석시전집」 등.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선창가 고동 소리 옛님이 그리워도/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타관 땅 밟어서 돈 지 십 년 넘어 반평생/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황혼이 찾어들면 고향도 그리워져/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새벽 별 찬 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어데로 흘러갈 흘러갈쏘냐」
 
  한 해가 다 가는 세밑, 길거리에 눈은 날리고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덧없는 세월만 또다시 떠나보내고 말았다는 쓸쓸한 追悔(추회)의 마음이 가슴에 가득할 때 이 노래는 더욱 사무치게 들려온다.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란 구절은 어찌 그리도 가슴에 절절하게 다가오는지. 길 가던 어느 누구라도 붙잡고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시간을 가진다면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슬픔으로 점철되었던 자신의 과거 발자취를 찬찬히 들려줄 것이다.
 
  우리는 정말 너무도 고단한 세월을 살아왔다. 수탈과 유린으로 가득한 日帝(일제) 강점기를 거쳐서 광복 직후의 격동기와 더불어 숨쉴 틈 없이 곧바로 발발한 동족상잔의 뼈아픈 수렁을 지나 우리의 현대사는 너무도 가파르고 고달프게 달려왔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우선 이 대목을 한번 음미해 보자. 사람은 누구나 생의 한 區間(구간)을 현재 살아가고 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구간을 걸어가고 있는가. 그 길에는 소나기가 내리고 땅은 질척거리며 독사와 맹수가 우글거리는 구역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심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곧 추락할 위기에 봉착한 사람도 있을 것이요, 또 어떤 사람은 때아닌 지진이나 폭풍을 만나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날아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인생을 우리는 대개 落魄(낙백)한 삶이라 일컫는다. 東拓(동척·동양척식회사)과 수리조합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떠밀려 달아나듯 만주와 시베리아로 떠나간 유랑 이민들이 바로 그러하였으리라. 그곳에서도 그들의 삶은 안정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 군경과 마적떼의 습격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연해주로 떠나간 동포들은 척박한 그곳을 피땀 흘려 개간하여 비옥한 토지로 만들었다. 삶이 비교적 안정되려 하자 느닷없이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가 실시되었다. 그간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다 버려둔 채 중앙아시아의 모래바람 부는 황량한 사막지대로 가축처럼 끌려가야만 했다. 日帝가 일으킨 전쟁에 끌려간 사람들의 경우도 처절 참담하였다. 

  
  日帝는 그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피를 빨고 인간의 기본권을 끝까지 말살시킨 후 죽음의 터전에 사납게 내팽개쳤다. 결국 그들의 인생 길에는 「정처」가 없었다. 방향을 잃고 거친 풍랑 속을 헤매 도는 조각배였다.
 
 
 
牛蹄魚
 
  日帝의 압제로부터 풀려났으나 안정된 시간은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더욱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한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원한에 사무친 새로운 敵(적)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적들은 서로에게 있어서 끝내 화해할 수 없는 배척의 대상이었다. 헛되기 짝이 없는 이념을 위하여 한평생을 고스란히 바쳐버린 덧없는 삶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끝내 同族相殘(동족상잔)이 터져서 서로를 죽이고 고향도 잃어버린 채 타관객지에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신세가 되어버린 사람이 무더기로 생겨났다. 

  
  이렇게 저렇게 굴곡 많았던 세월을 살아온 것이 우리네 삶이었다. 「타관 땅 밟아서 돈 지 십 년 넘어 반평생」이란 대목을 부르거나 들을 때는 마치 노랫말의 내용이 자신의 뜨내기 처지와 동질적 환경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더욱 격앙된 감정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특히 십여 년 이상을 해외에서 살아온 동포들의 경우, 이 대목에서 말할 수 없는 회한에 젖은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 이러한 모든 사정을 두루 폭넓게 반영하고 그들의 아픈 가슴을 쓸어주는 역할을 우리의 노래들이 담당했던 것이다.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는 대목을 듣거나 부를 때 생각나는 것은 白年雪(백년설)이 불렀던 「一字一淚(일자일루)」란 노래의 가사이다. 나를 버리고 떠나간 야속한 님에게 편지를 쓰는데 설움이 북받쳐 한 글자를 쓰고 눈물 떨구고, 또 한 글자를 쓰고 눈물을 떨구어 급기야 눈물에 얼룩진 편지가 되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나그네 설움」에서의 눈물은 지나온 삶의 발자취에 고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발자취마다 고인 눈물이라. 이 얼마나 가슴 쓰라린 사연을 함축하고 있는 말인가.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책을 보다가 「牛蹄魚(우제어)」란 단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 말은 젖은 길바닥에 찍힌 소 발자국에 고인 작은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란 뜻이다.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 것인 줄도 모르고 비좁은 공간에서 욕심에 허우적거리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비꼬는 말이다. 우리 민족 모두는 지나온 자죽마다 슬프고 서러운 눈물이 고인 삶을 살아왔다. 

  「선창가 고동소리」는 이 노래의 쓸쓸함을 더욱 배가시켜 주는 보조적 장치이다. 우리 가요에는 선창이나 부두를 배경으로 한 것들이 적지 않다. 가요에서 이 碇泊(정박)의 공간이 유달리 중시되는 것은 흔히들 센티멘털리즘으로 쉽게 풀이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것은 혹심한 고통 속에서 잠시나마 휴식을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機制(기제) 때문일 것이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가는 중간 지점. 그것이 바로 항구였고 부두였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어딘가를 향해 필연적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야릇한 상상에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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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뒷골목에서 떠오른 구절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는 대목이 지니는 보편성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느닷없이 내려친 鐵槌(철퇴)처럼 우리 삶을 강타한 경제 위기의 모진 폭풍에 직장을 잃고 가정도 거덜이 난 채로 가족은 뿔뿔이 이산하고 혼자 추운 밤거리를 지향 없이 떠돌아다니는 노숙자들이 많아졌다. 이들에게 우리의 조국은 異國(이국)보다 한결 냉혹하게 느껴질 것임에 틀림없다.
 
  이 대목에는 약간의 사연이 서려 있다. 작사자 曺景煥(조경환·1911~1956)은 원래 태평레코드 소속으로 작곡가 李在鎬(이재호·1914~1960), 가수 白年雪(1915~1980)과 함께 소문난 트리오를 이루었다. 「두견화 사랑」 「한 잔에 한 잔 사랑」 등이 그들의 작품이다. 趙鳴岩(조명암·1912~1993) 朴是春(박시춘·1913~1996)으로 대표되는 오케레코드의 콤비에 필적하는 태평레코드의 간판 스타가 바로 그들 트리오였다. 

  
  「번지 없는 주막」을 발매한 직후에 조경환은 백년설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의 호출을 받고 불려가서 호된 취조를 받았다. 이유는 주막집에 번지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그것이 조선의 현실을 상징한 것은 아니냐는 등 담당 경찰은 온갖 억지를 부리며 추궁을 했다. 결국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새고 시말서를 쓴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들은 몹시 허탈하고 울적한 나머지 광화문 뒷골목의 어느 선술집으로 들어가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조경환은 선술집의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문득 한 구절이 영감처럼 뇌리에 떠올랐다. 그것이 바로 이 대목이었다. 「낯익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