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황의 노래 흉내 내기

청춘무정

가포만 2019. 4. 21. 21:26

          

1941년 12월 20일    매일신보       

征野에 보내는 銃後의 赤誠 - 飛行機獻納運動 開城二臺, 平澤一臺

孔聖學,林憲章,孫洪駿,禹相甲,秦豪燮,黃性縣,金鍾勤,山階賢隆,孔聖學(實行委員委員長),林憲章(實行委員),朴鳳鎭(實行委員),山階賢隆(實行委員),金井米一(實行委員),金永輝(實行委員),秦豪燮(實行委員),林漢瑄(實行委員),金鍾勤(實行委員),金永漢(實行委員),朴二鉉(實行委員),禹相甲(實行委員),許塡(實行委員),
高漢承(實行委員),伊藤菊治郞(實行委員),孔鎭恒(實行委員),全日永(實行委員),井本喜市(實行委員),黃性縣(實行委員),咸豊敏煊(道會議員)國防婦人會大東亞戰爭(태평양전쟁),지나사변(중일전쟁)開城

본고는 문학계에서 동일 작가로 잘못 알고 있는 기존 연구의 오류들을 바로 잡고 아동문학가 고한승(高漢承)과 다다이스트 고한용(高漢容)의 생애와
문예 활동을 각각 재구하였다.
두 작가를 동일시한 오류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다. 시문학사, 특히 모더니즘과 다다이즘에 대한 연구에서 다다이스트 고한용을 아동문학가 고한승과 동일 인물로 보았다. 이 문학사적 오류들은 1940년의 임화에서 시작하여 1970~90년대의 김윤식 이후 여러 연구자들, 2000년대의 요시까와 나기 등 외국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었다. 즉, 후학자들은 선행연구자들의 오류를 의심이나 검증 없이 계속 따른 것이다.

아동문학가 고한승(高漢承)은 고도후(高燾厚)의 첫째 아들로 1902년 8월 27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동화와 소설을 쓸 때, 고한승(高漢承)이라는 본명과 서원(署園)이라는 호를 함께 사용했다. 시와 노래 가사, 희곡 등을 쓸 때는
고마부(高馬夫)라는 필명을 썼고 수필을 쓸 때는 고한승(高漢承)이라는
이름과 함께 포빙(抱氷)이라는 호를 썼다.
그는 해방 직전 ‘송도 항공 주식회사’의 사장 역을 맡았다. 해방 후 『어린이』를 복간하는 뜻 깊은 일을 했지만,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에 검거되어 친일파로 몰리기도 했다. 1949년 10월 29일에 부산에서 사망하였다.

다다이스트 고한용(高漢容)은 고석후(高錫厚)의 둘째 아들로 1903년 7월 23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필명은 고따따이다. 그는 일본유학 중 다다이즘을 알게 되어 일본의 다다이스트를 초대하는 등 한국에 다다이즘을 최초로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결혼 후, 집필활동을 중단하고 가정과 기업 경영에 힘을 쓰며, 책임 있는 가장으로서 평범하게 일상을 살았다. 1983년 10월 23일에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이렇듯이 아동문학가 고한승과 다다이스트 고한용은 전혀 다른 작가다.




고한승(高漢承)  아동문학가  1950년 사망

필명은 고따따, 고마부(高馬夫), 고사리, 고한용(高漢容).
1902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1923년 방정환(方定煥),
마해송(馬海松), 윤극영(尹克榮)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여 소년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잡지 <<어린이>>에 동화 <까마귀와 공작새>(1926)를
발표하면서 동화창작과 구연에 힘썼으며, 1927년 한국 최초의
창작동화집 <<무지개>>를 출간하였다. 광복 후에는 <<어린이>>를 복간,
계속하여 소년운동에 힘을 쏟았다. 한편 연극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1920년 봄 동경에서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922년 발족한 동경고학생단체인 형설회(螢雪會)에서 극예술협회에 순회극단 조직을 의뢰하자
조춘광(趙春光), 최승일(崔承一), 김영팔(金永八) 등과 함께
여기에 참가하였다. 형설회순회극단에서는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1923년 7월 전국을 순회하며 조춘광의 <개성이 눈뜰 때>와
고한승의 <장구한 밤>을 상연하였는데, 특히 <장구한 밤>은
입센과 하우프트만의 영향을 받아 창작한 당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939년 01월 16일  고려시보[高麗時報]  靑春無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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