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16)한정무의 ‘꿈에 본 내 고향’ 2016-10-19 농민신문

가포만 2016. 12. 17. 10:33

가고 싶어도 갈수 없는 고향…애간장 녹이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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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고향을 떠나온 지 몇몇 해련가 /타관 땅 돌고 돌아 헤매는 이 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 고향을 차마 못 잊어

 -한정무의 ‘꿈에 본 내 고향’ 전문



 한국인들은 유난히 고향에 대한 애착이 많은 민족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의 근원에 대한 확인과 충동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 한국인들은 농민의 아들딸이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산업화의 가속과 함께 도시로 도시로 몰려가면서 농촌은 텅텅 비고, 늙은이들만 남은 적막한 공간으로 바뀌고 말았지요. 이에 따라 명절이면 고향과의 연결성을 새삼 실감하면서 힘든 귀향길을 재촉합니다.

 고향은 우리 몸이 처음으로 생겨나 잠시 머물러 있었던 어머니 자궁이자, 영원한 사랑과 추억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을 가진 실향민들에게 고향은 눈물의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린 시절, 누님이 집 마당에서 전통혼례를 치르던 날, 잔칫집 대문 앞에 몰려온 부랑자(浮浪者)들도 이 노래를 합창으로 크게 불렀지요. 이른바 천형(天刑)이란 이유로 삶의 중심에서 소외된 한센씨 환자들의 합창은 너무나 애달프고 처연했습니다.

 평양에서 피란 내려온 실향민 가수 한정무(韓正茂, 1919~1960)는 부산 피란 시절 도미도레코드사에서 이 ‘꿈에 본 내 고향’을 취입했습니다. 원래 이 노래는 가수 송달협(宋達協, 1917~1955)이 악극무대에서 불러 이미 유행을 타고 있었습니다.

 한정무가 눈물 젖어 떨리는 음색과 창법으로 취입, 부산 피란 시절 막장의 삶을 어렵사리 이어가던 실향민들에게 크나큰 공감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특히 이 노래의 1절이 끝나고 가수의 목소리로 직접 읊어가는 독백체의 다음 대사 부분은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면서 귀향 충동을 왈칵 치밀어오르도록 이끌었지요.

 뜬구름아 물어보자 어머님의 문안을 /달님아 비춰다오 내 고향 실개천을 /생시에 가지 못할 한 많은 운명이라면 /꿈에라도 보내다오 어머님 무릎 앞에 /아아 어느 때 바치려나 부모님께 내 효성을 /꿈에 본 고향이 마냥 그리워

 이동순<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