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최초의 재즈 가수였던 복혜숙·2 매일신문

가포만 2017. 1. 23. 16:58

영화배우 명성 업고 수많은 영화극`가요 음반 취입

 
 
 
 

영화배우 복혜숙이 첫 음반을 낸 것은 1929년이었는데, 이 음반은 가요가 아니라 영화극이란 장르를 달고 있는 ‘장한몽’(1∼4)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파적 성격의 영화대본을 대중적 명성이 높은 배우로 하여금 직접 연기로 녹음하도록 해서 음반을 대중들에게 보급하려는 의도를 가진 전달체계였었지요. 이 음반에 이어서 ‘쌍옥루’(1∼4)를 취입했고, ‘부활’, ‘낙화유수’(상하), ‘숙영낭자전’(1∼4) 등을 발표했

했습니다. 영화극 음반으로는 이후에도 ‘불여귀’, ‘심청전’(상하)과 ‘하느님 잃은 동리’, 그리고 ‘춘희’(1∼4) 등을 줄기차게 내놓았습니다.


배우로서의 대중적 명성이 제법 알려지기 시작하던 1930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는 복혜숙의 가요음반 ‘그대 그립다’와 ‘종로행진곡’을 발매했습니다. 이어서 ‘목장의 노래’, ‘애(愛)의 광(光)’ 등을 발표하게 됩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이 음반들을 발매할 때 ‘시대요구의 째즈’란 이채로운 문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째즈’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식 재즈라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특성의 가요를 뜻하는 말로 보입니다. 이 음반의 종류로는 ‘째즈쏭’이란 꼬리표가 붙은 것이 이채로웠습니다. 말하자면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재즈가수였던 셈이지요.


새벽녘이 되어 오면 이내 번민 끝이 없네/ 산란해진 마음속에 비취는 것 뉘 그림자

그대 그립다 입술은 타는구나/ 눈물은 흘러서 오늘밤도 새어가네-’그대 그립다’ 1절


이 노래를 음반으로 들어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나는 곡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바로 후랑크나가이가 불렀던 ‘君恋し’(기미고이시)입니다. 이 노래는 1929년 일본에서 크게 히트했던 노래입니다. 이것을 번안해서 복혜숙이 불렀는데, 사실 원래는 콜럼비아사에서 윤심덕(尹心悳)에게 부탁을 했었는데 거절당하고 이어서 복혜숙에게 취입 제의를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복혜숙이 부른 노래를 들어보면 미숙한 아마추어 가수의 느낌이 풍겨납니다.


음정도 불안하고 박자도 갈팡질팡합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는 어찌하여

이런 복혜숙에게 재즈 음반 취입을 제의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녀가 이름난 배우로서 대중적 명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코드 회사는 복혜숙이 비록 가창력은 부족하지만 배우로서의 대중적 명성이

있었으므로 거기에 의존해서 일본 레코드 자본의 식민지 조선 연착륙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복혜숙의 활동과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1928년 그녀가 서울의 종로 인사동 입구에 비너스라는 다방을 열어

 8년 동안이나 운영했다는 사실입니다. 드나드는 손님들은 대부분 영화인 중심이었는데,

연극인, 언론인, 문단 인사들까지도 단골로 출입했다고 합니다.

다방 운영으로 얻은 수입은 모조리 영화인들을 위한 일에 썼다고 하니

복혜숙의 포부는 대단한 바가 있습니다.


복혜숙의 비너스 다방을 자주 찾아오던 경성의과대학 출신의 김성진이

그녀를 몹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라 두 사람의

사랑은 불륜으로 무려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결국 비밀스러운 신접살림을 차렸고,

마침내 세월이 흘러서 안방마나님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962년 영화계의 원로가 된 복혜숙은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장직에 선출되어 10년 동안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일평생 300여 편이 훨씬 넘는 영화에 출연했던 한국영화사의 개척자 복혜숙!

그녀가 배우로서 출연했던 마지막 작품은 1973년 ‘서울의 연가’란 제목의 영화입니다.


복혜숙의 나이 고희가 되던 그해에 방송인, 영화인들은 정성을 모아서

조촐한 칠순잔치를 차려주었습니다. 그 시절, 복혜숙의 노년기 삶에서 가장 즐겁고

흐뭇한 일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던 낙선재로 가서 칠보장식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1982년 배우 복혜숙은 서울에서 78세를 일기로

이승에서의 장엄했던 삶을 마감했습니다.


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