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최초의 재즈 가수였던 복혜숙·1 매일신문 2014-01-29

가포만 2017. 1. 23. 16:55

장르간 분할과 독립이 확고하지 않던 시절 대중문화계 선구자로

 
 
 

한국의 대중문화사에서 초창기에 활동했던 분들은 대개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 적어도 두세 개 이상의 장르에 참여했던 경력들이 보입니다. 연극배우가 영화에 출연하거나, 가수처럼 음반 취입에 활용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강홍식, 전옥, 신카나리아, 최승희, 강석연, 김선초, 이경설, 이애리수, 왕평 등이 바로 그러한 표본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가요 이야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복혜숙(卜惠淑, 1904∼1982)에 관한 내용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복혜숙은 영화배우가 중심이었지요. 그리고 개척기 한국영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았던 대중문화계의 선구자였습니다.


복혜숙이 배우가 된 과정은 가히 운명적이라 할 만합니다. 1904년 충남 보령에서 기독교 전도사를 하던 복기업의 딸로 출생한 복혜숙은 어머니가 전도사업 때문에 오해를 받고 체포되어 옥중에서 고생을 할 때 어머니의 배속에서 함께 고생을 겪던 끝에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름도 성서에 나오는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복마리(卜馬利)였습니다. 나중에 목사가 되었던 아버지는 논산으로 이사를 했고, 병약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계모가 차지하게 된 가정이 점점 싫어졌습니다.


 혼자 서울로 올라가서 이화학당을 다녔는데 재학 중에는 학교 공부보다도 뜨개질을 비롯한 수예가 너무 좋아서 수예학원을 다녔습니다. 그 학원에서 주선을 해주었던 요코하마수예학원으로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지요. 이곳에서 연극 공연에서부터 뮤지컬 공연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연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관람했는데 이것이 복혜숙을 배우의 길로 이끌도록 했던 가장 커다란 힘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한번은 무용공연을 보고 너무 심취해서 무용연구소에 나가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데 고국에서 딸을 찾아온 아버지가 그 현황을 보고 격노해서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아버지는 강원도 김화교회의 목사가 되어서 임지로 떠나게 되었고, 복혜숙도 아버지를 따라 가 교회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단조롭고 무료한 생활이 너무도 싫었던 복혜숙은 어느 날 아버지 몰래 짐을 챙겨서 서울로 무작정 올라와버렸습니다.


서울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극장이었던 단성사를 찾아가 인기변사 김덕경을

만나 배우가 되고 싶은 자신의 포부를 밝혔습니다. 김덕경은 신극좌(新劇座)의

김도산(金陶山)에게 연결시켜 주었고, 거기서 여러 편의 신파극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활이 점점 곤궁해진 복혜숙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겠다는

뜻을 밝히고 살아갔지만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무대 활동의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또 새로운 목적지를 찾은 곳이 중국의 대련항이었는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연락해둔 아버지의 신고로 경찰에 붙들려 압송되고 말았습니다. 1

921년 복혜숙은 현철(玄哲)이 조선배우학교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 입학했습니다. 이때 배우학교의 동기생들이 왕평, 이경설 등입니다.


한번은 극작가 이서구가 찾아와서 토월회의 여배우 자리가 갑자기 비게 되었는데

보충할 만한 배우 하나를 급히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복혜숙은 여기에 지원해 열심히 무대 활동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연극배우로서의 생활입니다.

이어서 복혜숙이 영화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은 1926년입니다.

이규설(李圭卨) 감독이 제작하고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한 영화

‘농중조’(籠中鳥)에 첫 출연을 했습니다.

이 ‘농중조’는 일본말로 ‘가고노도리’, 즉 ‘새장 속에 갇힌 새’라는 뜻입니다.


1927년에는 이구영(李龜永) 감독의 ‘낙화유수’, 1928년에는 ‘세 동무’,

 ‘지나가(支那街)의 비밀’ 등에 연이어 출연함으로써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굳건하게 다졌습니다. 복혜숙의 생애를 돌이켜보노라면 만약 그녀가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를 받아들여서 고분고분 순종하고 평범한 현모양처나

학교 교사로 살았다면 결코 이후에 펼쳐간 배우로서의 삶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집을 나간 딸이 두어 차례 이상 아버지의 강압적인 뜻으로 끌려 되돌아오게 되지만

복혜숙은 기어이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부친의 뜻에 거역하고 일탈을 감행합니다.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