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라는 난세였다면 모르겠거니와 8·15 광복이 되었는데도 왜 우리는 한가족이 고향 집에서 오순도순 살지 못하고 또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단 말입니까?
광복은 해외로 떠나갔던 동포들이 귀국선을 타고 돌아오는 감격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사상과 이념의 갈등, 분열과 대립의 현대사 속에서 이 땅의 아들딸들은 또 고향 집을 떠나 정처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후 6·25 한국전쟁의 대혼란 속에서 가정의 평화는 송두리째 깨지고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지요. 이후로도 여러번 반복되었던 독재정권의 출현 속에서 평화로웠던 가정에 먹구름이 드리웠던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베트남전쟁, 파독 간호사 및 광부, 중동근로자 파견 등등….
어느 하루도 편할 틈 없이 우리의 고향 집은 온갖 근심 걱정, 시련과 눈물 속에서 보낸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1947년 봄, 작곡가 박시춘(朴是春·1913~1996) 선생이 이끌어가던 럭키레코드사에서는 기막힌 노래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제목은 ‘비 내리는 고모령(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입니다.
지금은 폐쇄된 간이역인 고모(顧母)역은 동대구역에 못 미친 지점인 대구 수성구 고모동에 있습니다. 부근에는 주민들이 대구로 장보러 넘어가던 고개 고모령(顧母嶺)도 있지요. 어머니를(母) 돌보며 보살피는(顧) 고개(嶺)라는 뜻이지요.
가랑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고모역과 고모령 부근을 거니노라면 이 노래에 서려 있는 어머니와 징용 가는 아들의 이별 장면, 험난한 민족사의 세월 속에서 그 고통을 이 악물고 이겨낸 우리 겨레의 피눈물이 보이는 듯합니다.
‘비 내리는 고모령’이 만들어진 역사적 현장으로 직접 가서 노래 속에 담긴 역사의 빛깔을 음미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구나// 맨드라미 피고지고 몇해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나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눈물어린 인생고개 몇 고개더냐/ 장명등이 깜박이는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쓰린 하소 적어가면서/ 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비 나리는 고모령’ 전문
이동순<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